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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생각 없이 보기시작했다가 끝까지 보게 된 영화가 있습니다. 2005년 제작, 2006년 국내 개봉한 일본 코미디 영화 '거북이는 의외로 빨리 헤엄친다'입니다. 처음엔 그냥 가볍게 볼 수 있는 영화인 줄 알았는데, 다 보고 나서도 며칠 동안 머릿속에서 지워지지가 않았습니다. 특히 라면 가게 사장님 장면은 지금도 가끔 생각납니다.

줄거리와 결말
영화는 거북이 타로에게 밥을 주는 주부 스즈메의 모습으로 시작합니다. 해외에 단신 부임 중인 남편은 안부 전화를 걸어서도 아내 걱정보다 거북이가 밥은 먹었는지를 먼저 묻습니다. 제가 이 오프닝을 보면서 픽 웃었던 이유는, 저도 이런 일상을 아주 잘 알기 때문입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하루가 쌓여서 사람을 조금씩 투명하게 만드는 느낌, 그게 스즈메한테서 바로 보였습니다.
스즈메는 어느 날 계단 난간에 손톱만 한 크기로 붙어있는 스파이 모집 광고 스티커를 발견합니다. 여기서 이 영화 특유의 '유루카와(ゆるかわ)' 감성이 본격적으로 드러납니다. 유루카와 란 '느슨하고 귀엽다'는 뜻의 일본식 미학 개념으로, 힘을 빼고 흘러가듯 귀여운 분위기를 말합니다. 억지스럽지 않고 무심하게 흘러가는데 어느새 미소가 번지는 그 느낌이 이 영화 전체를 관통합니다.
스파이 부부를 만난 스즈메는 500만 엔이라는 거액의 활동 자금을 받고 채용됩니다. 그런데 그녀에게 주어진 임무가 압권입니다. 바로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도록 세상에서 가장 평범하게 살 것'. 스즈메는 이날부터 마트에서 장을 볼 때도, 길을 걸을 때도, 눈에 띄지 않기 위해 온 신경을 곤두세우며 살아갑니다. 어제와 똑같은 하루를 보내는 것이 가장 치열한 임무가 되는 것입니다.
저는 이 설정이 너무 좋았습니다. 직접 겪어보니, 매일 반복되는 일상을 유지하는 것도 사실 꽤 많은 에너지가 드는 일이거든요. 그걸 영화가 '스파이의 위장술'이라는 말로 포장해주니까, 묘하게 위로가 됐습니다.
결말에서는 스파이 부부와 라면 가게 사장님에게 본국 귀환 명령이 내려집니다. 각자 들키지 않고 마을을 떠나야 하는 마지막 미션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라면 가게 사장님의 선택이 제 마음을 가장 오래 붙들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스파이라는 사실을 들키지 않기 위해, 손님이 너무 몰리지도 너무 없지도 않도록 평생 일부러 '어중간한 맛'의 라면만 끓여 온 인물입니다. 맛있는 라면을 끓일 능력이 분명히 있는데도, 그것을 꺼내지 않은 채 수십 년을 보낸 것입니다.
영업 마지막 날, 그는 처음으로 자신의 진짜 실력을 담은 라면을 끓입니다. 그리고 옆집 사장님과 단둘이 그 라면을 나눠 먹으며 함께 눈물을 흘립니다. 저는 이 장면을 보면서, 그 라면 한 그릇이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그 사람의 삶 전체처럼 느껴졌습니다. 드러내지 못한 것들, 보여주지 못한 것들, 그것들이 마지막 한 그릇에 다 담겨있는 것 같아서요.
한편 스즈메의 소꿉친구 쿠자쿠는 프랑스 파리로 떠났다가 진짜 스파이로 오해받아 경찰에 체포되는 황당한 상황에 놓입니다. 뉴스로 이 소식을 접한 스즈메는 평생 지켜온 투명한 일상을 깨고, 500만 엔을 챙겨 친구를 구하러 프랑스행 비행기를 탑니다. 집을 나서기 전, 좁은 어항에서만 살던 거북이 타로를 강물에 놓아주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러자 거북이는 놀라울 만큼 빠른 속도로 물살을 헤치고 나아갑니다. 그 순간 제목의 의미가 비로소 완성됩니다.
- 감독: 미키 사토시 / 개봉: 2005년 제작, 2006년 국내 개봉
- 주연: 우에노 주리(스즈메 역), 아오이 유우(쿠자쿠 역)
- 핵심 설정: 평범함을 유지하는 것이 스파이의 유일한 임무
- 장르 분류: 유루카와 코미디 — 느슨하고 귀여운 일본식 감성 코미디의 정수
- 넷플릭스에서 현재 스트리밍 중 (출처: Netflix)
감상평
예상 밖이었습니다. 처음엔 엽기적인 장면들이 많아서 그냥 B급 코미디 정도로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다 보고 나서 한 가지 생각이 계속 맴돌았습니다. 달라진 건 스파이가 됐다는 사실 하나뿐인데, 어제까지 지루하게 느껴지던 스즈메의 일상이 갑자기 긴장감 있고 생기 있게 바뀐다는 것. 결국 특별했던 건 일상이 아니라, 그 일상을 바라보는 마음이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영화 비평 전문 매체 키노마니아(Kinomania)와 일본 영화 데이터베이스 eiga.com에서도 이 작품을 '생활 밀착형 코미디(Slice-of-Life Comedy)의 수작'으로 평가합니다. 생활 밀착형 코미디란 거창한 사건 대신 평범한 일상의 디테일에서 웃음과 감동을 끌어내는 장르를 말합니다. (출처: eiga.com) 이 영화가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인생 영화로 꼽히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고 봅니다.
스즈메와 쿠자쿠의 관계도 제가 보기에는 좀 다르게 다가왔습니다. 스즈메는 자유롭고 화려하게 사는 쿠자쿠를 늘 부러워합니다. 그런데 쿠자쿠는 반대로 안정적이고 조용한 스즈메의 삶을 특별하다고 여깁니다. 서로가 서로를 특별하게 바라보고 있던 것입니다. 제가 이 장면에서 느낀 건, 내가 부러워하는 누군가는 어쩌면 지금의 나를 부러워하고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꼭 누군가가 알아봐 주지 않더라도, 그냥 내가 스스로 나를 특별하게 여기면 된다는 것도요.
미키 사토시 감독 특유의 연출 스타일인 앙상블 코미디(Ensemble Comedy) 방식도 이 영화의 큰 강점입니다. 앙상블 코미디란 주인공 한 명이 아니라 개성 있는 조연들이 각자의 이야기를 가지고 유기적으로 얽히며 극을 이끌어가는 방식을 말합니다. 스파이 부부 시즈오와 에츠코 콤비의 진지해서 더 웃긴 개그 호흡, 그리고 라면 가게 사장님 마츠시게 유타카의 묵직한 감정선까지, 조연 한 명 한 명이 저마다의 무게를 갖고 있습니다.
이 영화는 억지로 감동을 주려 하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오래 남습니다. 관람객들의 반응도 비슷합니다. "매일 반복되는 출퇴근이 사실은 스파이의 위장술이라고 생각하니 피식 웃음이 났다", "평범하게 사는 것도 사실은 엄청난 노력이라는 걸 이렇게 귀엽게 표현할 줄은 몰랐다"는 후기가 많습니다. 무기력하거나 일상이 지루하게 느껴질 때 딱 한 번 보면 좋은 영화입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거북이는 의외로 빨리 헤엄친다, 지금 어디서 볼 수 있나요?
A. 넷플릭스에서 스트리밍 중입니다. 제가 직접 확인한 기준으로는 한국 넷플릭스에서 자막과 함께 감상할 수 있었습니다. 플랫폼 사정에 따라 변동될 수 있으니 검색해서 확인해 보시는 걸 권합니다.
Q. 영화 제목 '거북이는 의외로 빨리 헤엄친다'가 무슨 뜻인가요?
A. 결말에서 스즈메가 좁은 어항 속 거북이 타로를 강물에 놓아주자, 거북이가 믿기 어려울 만큼 빠르게 헤엄쳐 나아가는 장면이 나옵니다. 느리고 답답하다고 여겼던 거북이처럼, 평범하다고 여겼던 스즈메의 삶 속에도 언제든 꺼낼 수 있는 힘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제 경우엔 이 장면에서 제목의 의미가 이해됐습니다.
Q. 우에노 주리 말고 다른 출연진도 유명한 배우인가요?
A. 쿠자쿠 역을 맡은 아오이 유우는 일본에서 꾸준히 활동해온 배우로, 독특한 존재감으로 유명합니다. 라면 가게 사장님 역의 마츠시게 유타카는 일본 드라마 '고독한 미식가'의 주연으로 한국에도 잘 알려져 있어서, 그 분이 이 영화에 나온다는 사실 자체가 반가웠습니다.
Q. 코미디 영화인데 너무 가볍지 않나요? 진지하게 볼 만한가요?
A. 제가 딱 그렇게 생각하면서 봤다가 예상 밖으로 오래 생각나는 영화가 됐습니다. 폭소가 터지는 유형이 아니라 실소가 나오는 건조한 유머인데, 다 보고 나면 묘하게 위로받은 기분이 드는 영화입니다. 가볍게 시작해서 묵직하게 마무리되는 스타일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결론
'거북이는 의외로 빨리 헤엄친다'는 특별해지려고 애쓰는 사람들에게 그냥 지금 이 평범한 하루도 충분히 대단한 거라고 말해주는 영화입니다. 거창하게 말하지 않고, 엉뚱하고 귀엽게 그 이야기를 풀어낸다는 점이 오히려 마음에 오래 남았습니다.
무기력하거나 일상이 너무 익숙해서 지루하게 느껴지는 날이 있다면, 이 영화를 한 번 보시길 권합니다. 저는 라면 가게 사장님의 마지막 한 그릇이 아직도 생각납니다. 자신의 진짜 실력을 마지막 날에야 꺼낸 그 장면처럼, 우리 각자에게도 아직 꺼내지 않은 무언가가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