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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저는 처음 이 영화를 틀었을 때 20분 만에 끄고 싶었습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였거든요. 그런데 끝까지 본 뒤, 도리어 한동안 멍하게 앉아 있었습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걸어도 걸어도>는 장남의 기일에 하루 동안 모인 가족의 이야기입니다. 극적인 사건은 없습니다. 하지만 그 '아무것도 없음' 속에 가장 날카로운 진실이 들어 있었습니다.

가족애도, 이 영화가 우리를 불편하게 만드는 이유
영화를 보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 가족, 어딘가에서 본 것 같다.' 아버지 쿄헤이는 의사로서의 삶에 모든 자부심을 걸었던 사람입니다. 장남 준페이가 세상을 떠나고 나서도, 차남 료타에게 의업을 이어달라는 기대를 내려놓지 못합니다. 겉으로는 말을 아끼지만, 료타가 미술품 복원 일을 한다고 하면 식탁에 미묘한 침묵이 깔립니다. 제가 직접 겪어봤는데, 그 침묵이 백 마디 잔소리보다 더 무겁습니다.
어머니 토시코의 장면에서는 솔직히 등이 서늘해졌습니다. 그녀는 매년 기일마다 준페이가 목숨을 바쳐 구한 소년 요시오를 집으로 초대합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증오할 상대가 없는 만큼 괴로움은 더한 거야. 그러니 그 아이한테 1년에 한 번쯤 고통을 준다고 해서 벌받지 않아." 이 대사를 처음 들었을 때, 저는 잠시 숨을 참았습니다. 악인의 독백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가장 인간적인 슬픔의 고백입니다.
여기서 '애도(哀悼, mourning)'라는 개념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애도란 단순히 고인을 그리워하는 감정이 아니라, 상실 이후 심리적 균형을 회복해나가는 일련의 과정을 말합니다. 정신의학 분야에서는 이 과정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할 때 '복잡성 애도(complicated grief)'가 나타난다고 봅니다. 쉽게 말해, 슬픔이 정상적인 흐름을 따르지 못하고 분노나 집착, 타인을 향한 가해로 굳어버리는 상태입니다. 토시코의 행동은 바로 그 복잡성 애도의 전형적인 모습이고, 영화는 그것을 단죄하지 않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료타의 처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살아생전 단 한 번도 형과 동등하게 대우받지 못했다고 느낍니다. 요시오를 향해 가족들이 "네가 살고 형이 죽었어야 했다"는 마음을 품을 때, 료타만이 그의 편을 들어줍니다. 형에게 오랫동안 열등감을 느껴온 사람만이 그 감정의 무게를 알기 때문입니다. 제 경험상, 가족 안에서 '2인자'로 자란 사람의 상처는 밖에서 보기보다 훨씬 깊고 오래갑니다.
재혼한 아내 유카리와 의붓아들 아츠시는 이 가족에서 일종의 '외부 관찰자' 역할을 합니다. 혈연 중심의 폐쇄적인 공동체 안에서 조심스럽게 자리를 찾아가는 유카리의 모습은 보는 내내 안쓰러우면서도 단단해 보였습니다. 시어머니가 처음엔 과부와의 결혼을 불길하다고 여기면서도 유카리의 성실함에 마음을 조금씩 열어가는 과정은, 관계란 결국 시간과 태도가 쌓여서 만들어지는 것임을 조용히 보여줍니다.
- 쿄헤이: 가업 계승에 대한 집착과 소외감 사이에서 흔들리는 가부장의 초상
- 토시코: 복잡성 애도가 타인을 향한 가해로 굳어버린 어머니의 민낯
- 료타: 영원한 2인자의 콤플렉스를 안고 살아가는 우리 주변의 보통 자식
- 유카리·아츠시: 혈연 공동체 바깥에서 새로운 가족의 형태를 뚜벅뚜벅 만들어가는 존재들
뒤늦은 후회, 삶은 왜 항상 한 발 늦게 도착할까
이 영화에서 가장 오래 머릿속에 남는 건 사실 극적인 대사가 아닙니다. 료타가 아버지에게 "욕실 타일 고쳐드릴게요", "다음엔 차 태워드릴게요"라고 무심코 던지는 말들입니다. 특별하지 않고, 급하지도 않기 때문에 우리는 그 약속을 흘려보냅니다. 그리고 영화는 그 '다음'이 끝내 오지 않았음을 담담하게 보여줍니다. 저도 이 장면을 보면서 제가 부모님께 흘려보낸 약속들이 몇 개나 되는지 세어보다가 그만뒀습니다. 너무 많아서요.
영화의 제목 '걸어도 걸어도'는 일본 원제 '歩いても 歩いても'에서 왔습니다. 아무리 걸어도 닿지 못하는 거리, 그것이 부모와 자식 사이의 본질적인 시간 격차를 표현합니다. 고레에다 감독은 인터뷰에서 이 영화가 돌아가신 어머니를 떠올리며 만든 작품이라고 밝힌 바 있습니다. 실제로 영화 전반에 흐르는 '뒤늦음'의 정서는 단순한 연출 기법이 아니라 감독 자신의 실제 감정에서 비롯된 것입니다(출처: Cinémathèque française —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아카이브).
심리학에서는 이러한 후회의 패턴을 '행위 부작위 편향(omission bias)'으로 설명하기도 합니다. 행위 부작위 편향이란, 무언가를 했다가 나쁜 결과가 생긴 것보다 하지 않아서 생긴 후회가 시간이 지날수록 훨씬 더 깊고 오래 지속되는 현상을 말합니다. 쉽게 말해, "그때 했어야 했는데"라는 후회가 "그때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보다 평생을 더 오래 따라다닌다는 뜻입니다. 료타가 부모님 묘를 정리하는 마지막 장면에서 느끼는 감정이 바로 그것입니다.
영화에는 상징적인 장면이 하나 더 있습니다. 밤에 나비 한 마리가 집 안으로 들어와 준페이의 사진에 앉습니다. 어머니 토시코는 그게 준페이라고 믿고, 료타는 동의하지 않으며 나비를 잡아 밖으로 풀어줍니다. 이 짧은 장면 하나가 두 사람이 상실을 얼마나 다르게 감당하고 있는지를 말없이 보여줍니다. 슬픔을 상징(symbol)으로 붙잡으려는 어머니와, 그것을 현실로 돌려보내야 한다고 느끼는 아들. 어느 쪽이 옳고 그르다고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영화의 정서적 맥락은 일본 특유의 '모노노아와레(物の哀れ)' 미의식과도 깊이 맞닿아 있습니다. 모노노아와레란 사물이나 사람, 시간이 덧없이 흘러가는 것에서 오는 애잔함과 감동을 동시에 뜻하는 미학 개념입니다. 일본 문화청은 이 개념을 헤이안 시대 문학 전통에서 비롯된 일본 고유의 감성 언어로 정의합니다(출처: 일본 문화청(文化庁) 공식 사이트). <걸어도 걸어도>는 그 감성의 현대적 표현으로 봐도 손색이 없습니다. 제가 직접 이 영화를 두 번 봤는데, 두 번째가 훨씬 더 아팠습니다. 처음에는 인물들을 관찰했고, 두 번째는 제 자신이 보였기 때문입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걸어도 걸어도, 영화 내용이 너무 느린데 지루하지 않나요?
A. 솔직히 저도 처음 20분은 지루하다고 느꼈습니다. 그런데 이 영화의 속도 자체가 의도된 연출입니다. 극적인 사건 없이 일상의 리듬으로 흐르는 구조 덕분에, 오히려 인물들의 감정이 자연스럽게 스며듭니다. 자극적인 영화에 익숙하다면 처음엔 어색할 수 있지만, 끝까지 보고 나면 그 여운이 꽤 오래 남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Q. 영화 속 나비 장면은 무슨 의미인가요?
A. 밤에 집 안으로 날아든 나비가 준페이의 사진에 앉는 장면입니다. 어머니 토시코는 그 나비를 아들의 영혼이라 믿고, 료타는 동의하지 않으며 밖으로 풀어줍니다. 같은 상실을 두고 어머니는 상징에 기대고 아들은 현실로 돌아서는, 두 사람의 애도 방식이 다름을 조용히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대사 한 마디 없이 가장 많은 것을 말하는 이 영화의 백미라고 생각합니다.
Q.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다른 영화도 이런 분위기인가요?
A. 대체로 그렇습니다. <태풍이 지나가고>,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어느 가족> 등 고레에다 감독의 작품은 가족 내부의 균열과 애정을 담백하게 담아내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걸어도 걸어도>가 좋으셨다면 같은 결의 여운을 기대하셔도 됩니다. 제가 개인적으로는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와 함께 이 작품을 가장 자주 떠올리게 됩니다.
Q. 영화에서 어머니 토시코가 요시오를 계속 부르는 게 너무 잔인한 거 아닌가요?
A. 처음 봤을 때 저도 그렇게 느꼈습니다. 하지만 복잡성 애도라는 맥락으로 보면, 토시코의 행동은 단순한 악의가 아닙니다. 증오할 대상도, 책임을 물을 대상도 없는 상실 앞에서 그 고통을 어딘가에 기댈 수밖에 없었던 어머니의 처절한 방어 기제입니다. 그렇다고 옳다는 뜻은 아니지만, 그 감정만큼은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결론
<걸어도 걸어도>를 보고 나서 한동안 부모님께 전화를 더 자주 했습니다. 용건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목소리를 듣고 싶어서요. 이 영화가 그런 영화입니다. 설교하지 않고, 훈계하지 않고, 그냥 가만히 보여줍니다. 당신 가족도 이렇지 않냐고, 묻지도 않으면서요.
속도가 느려서 답답하게 느껴지는 분들도 분명 있을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의 '뒤늦음'을 이렇게 정밀하게 담아낸 영화를 저는 달리 본 기억이 없습니다. 올여름, 뜨거운 햇살 아래 조용히 앉아 이 영화 한 편을 권합니다. 다 보고 나서 연락하고 싶은 얼굴이 떠오른다면, 그 타이밍에 바로 전화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