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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다 보고 나서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습니다. 정확히는 료타가 카메라 메모리를 열어보는 그 장면에서 뭔가가 무너지는 느낌이었는데, 왜 그런지 한참 후에야 정리가 됐습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는 핏줄과 시간 사이에서 "진짜 아버지란 무엇인가"를 묻는 영화입니다. 결말의 카메라 사진 한 컷이 그 질문에 가장 잔인하고 정확하게 답하고있습니다.

엘리트 아버지 료타, 그리고 6년의 균열
처음에는 료타가 그냥 나쁜 아버지 캐릭터로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보면 볼수록 그가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 보입니다. 그는 나름의 방식으로 최선을 다하고 있었고, 그 방식이 문제였던 것입니다.
대형 건설사 엘리트 사원 료타(후쿠야마 마사하루)는 아내 미도리, 아들 케이타와 함께 삽니다. 흠잡을 곳 없는 아파트, 피아노 레슨, 명문 초등학교 입시 준비까지. 료타는 자신이 아들에게 줄 수 있는 것들을 환경과 조건으로 증명하려 했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산후조리원으로부터 연락이 옵니다. 6년 전 신생아 뒤바뀜이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친자 류세이는 시골 전파상을 운영하는 사이키 유다이(릴리 프랭키) 가족 밑에서 자라고 있었습니다. 두 가족은 완전히 달랐습니다. 료타 가족이 질서와 기준으로 움직이는 집이라면, 사이키 가족은 아이들과 바닥에서 뒹굴고 목욕탕에서 같이 노는 집이었습니다. 사이키가 "시간이 중요한 거지"라고 말하자 료타가 "시간만 있으면 다 되나?"라고 받아치는 장면은 이 두 캐릭터의 차이를 한 문장으로 압축합니다.
솔직히 이 부분에서 저는 료타 편이었습니다. 어느 정도는요. 그런데 영화가 끝날 때쯤 그 생각이 완전히 뒤집혔습니다.
카메라 사진 장면, 비트 단위로 쪼개면 보이는 것
아이들을 교환한 뒤, 료타는 류세이와 살게 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카메라를 만지작거리다 메모리 카드를 확인합니다. 화면에 뜨는 사진들은 전부 잠든 자기 모습입니다. 소파에서, 식탁에서, 와이셔츠 차림 그대로 곯아떨어진 모습. 누가 찍었는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케이타가, 6년간 료타를 아빠로 알고 자란 그 아이가 몰래 찍어둔 사진들입니다.
제가 이 장면에서 무너진 이유는 명확했습니다. 사진 속 료타는 단 한 장도 깨어 있지 않습니다. 케이타가 아빠를 카메라에 담을 수 있는 유일한 순간이, 아빠가 일에 지쳐 쓰러진 그 순간뿐이었던 것입니다.
고레에다의 미장센(Mise-en-scène) — 화면 안에 모든 것을 담는 방식
미장센이란 카메라 앵글, 조명, 배우의 위치, 소품 배치 등 화면 안의 모든 시각적 요소를 연출하는 기법을 말합니다. 쉽게 말해 "카메라 밖이 아니라 카메라 안에서 이야기하는 방식"입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이 장면에서 세 가지를 동시에 절제합니다.
대사를 뺐습니다. 료타는 사진을 보면서 한 마디도 하지 않습니다. 음악도 거의 없습니다. 카메라 셔터 소리와 화면 넘기는 소리만 남습니다. 그리고 클로즈업을 사진을 한참 보여준 뒤에 넣습니다. 관객이 충분히 사진을 함께 본 뒤에야 료타의 얼굴이 들어옵니다. 이 세 가지를 모두 뺀 자리에 관객이 자기감정을 스스로 채워 넣게 됩니다. 이게 고레에다 연출의 핵심입니다.
케이타는 영화 내내 료타가 답답해하던 아이였습니다. 피아노도 그저 그렇고, 끈기가 없다는 말을 자주 들었습니다. 그런데 케이타는 사실 굉장히 섬세한 관찰자였습니다. 6살짜리가 카메라를 들고, 찍을 가치가 있는 순간을 잡아내는 아이. 그것이 케이타가 가장 잘하는 일이었는데 료타는 6년 동안 한 번도 알아채지 못했습니다.
- 잠든 료타 사진 → "아빠가 깨어 있을 때 곁에 없었다"는 증거
- 카메라라는 소품 → 료타의 도구가 아닌 케이타의 도구로 역전
- 대사·음악 절제 → 관객이 자기 감정으로 침묵을 채우는 구조
- 클로즈업 지연 → 충격이 료타에게 도착하는 과정을 함께 경험하게 함
이 연출 방식은 고레에다의 다른 작품에서도 일관됩니다. <아무도 모른다>(2004), <어느 가족>(2018, 칸 황금종려상), <브로커>(2022, 송강호 칸 남우주연상)로 이어지는 유사가족 시리즈 전반에서 "핏줄 아닌 사람들이 어떻게 가족이 되는지"를 일상의 디테일로 쌓아 올리는 방식이 반복됩니다(출처: Festival de Cannes 공식 사이트).
결말의 열린 구조가 한국 관객을 무너뜨린 이유
영화는 두 가족이 집 안으로 들어가는 장면으로 끝납니다. 케이타와 류세이의 진짜 부모가 누구인지, 어떻게 끝나야 해피엔딩인지 영화는 끝내 말하지 않습니다. 이 열린 결말(open ending, 관객에게 결론의 판단을 맡기는 서사 구조)이 오히려 더 오래 남습니다. 여기서 열린 결말이란 단순히 애매하게 끝내는 것이 아니라, 영화가 제기한 질문 자체를 관객의 삶 안으로 가져가게 만드는 장치입니다.
결말에서 골목길 추격 시퀀스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료타가 케이타를 쫓아가는데, 두 사람은 평행한 골목에서 따로 걷습니다. 결국 두 골목이 합쳐지는 지점에서 케이타가 멈추고, 료타는 무릎을 꿇습니다. 이 공간적 구성이 두 사람의 관계를 고스란히 말해줍니다. 이 장면은 영화를 다시 봤을 때 더 아팠습니다. 처음엔 감정에 휩쓸려 이 구도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거든요.
한국에서 이 영화가 특히 잘 통한 이유도 여기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 30~50대 남성에게 "일에 매몰돼 아이를 보지 못한 아버지"라는 캐릭터는 너무 와닿습니다. 본인의 모습이거나, 본인 아버지의 모습이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저도 영화를 보면서 아버지가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카메라 장면에서 다들 무너지는 것 같습니다.
영화의 배경 정보 하나가 더 있습니다. 칸 영화제 심사위원상(Prix du Jury)을 받은 2013년 제66회 칸 영화제에서, 영화를 본 스티븐 스필버그가 즉시 헐리우드 리메이크 판권을 매입했습니다. 그러나 10년이 넘도록 진척이 없습니다. 이 영화의 정서가 일본 가족 문화의 특수성과 너무 깊이 맞닿아 있어서 미국 배경으로 바꾸기 어렵다는 분석이 많습니다(출처: IMDb - Like Father, Like Son(2013)). 료타처럼 가정을 희생하며 회사에 헌신하는 일중독 아버지 캐릭터가 미국 중산층 서사로 바꾸기 쉽지 않다는 것이죠.
자주 묻는 질문
Q.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결말에서 케이타와 류세이는 결국 어느 집으로 가나요?
A. 영화는 두 가족이 함께 집 안으로 들어가는 장면으로 끝나고 명확히 말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의도된 열린 결말입니다. 핏줄과 시간 중 무엇이 가족을 만드는지의 판단을 관객에게 돌려주는 구조입니다. 혹시 이 질문이 마음에 걸린다면, 그것이 영화가 의도한 효과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Q. 카메라 사진 장면에서 케이타가 찍은 사진이 전부 잠든 료타인 이유가 있나요?
A. 단순한 우연이 아닙니다. 료타가 깨어 있는 동안에는 케이타 곁에 있어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케이타가 아빠를 렌즈에 담을 수 있었던 유일한 순간이 아빠가 일에 지쳐 쓰러진 순간뿐이었다는 뜻으로, 고레에다가 의도적으로 설계한 디테일입니다.
Q.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인가요?
A. 고레에다 감독 본인은 특정 실화를 직접 모티브로 삼지 않았다고 밝혔습니다. 다만 일본에서는 1970년대 산후조리원 신생아 뒤바뀜 사건이 실제로 여러 건 있었고, 그 사건들이 일본 사회에서 일종의 집단 기억처럼 남아 있어 일본 관객이 영화의 전제에 자연스럽게 연관짓게 됩니다.
Q.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다른 영화도 이런 분위기인가요?
A. 비슷한 주제 의식을 가진 작품들이 있습니다. <어느 가족>(2018)은 핏줄 없는 사람들이 가족을 꾸리는 이야기로 칸 황금종려상을 받았고, <브로커>(2022)는 송강호 주연으로 같은 주제를 한국 배경으로 풀었습니다. <아무도 모른다>(2004)는 이 계열 작품의 출발점으로 볼 수 있습니다.
결론
영화를 본 지 한참이 지났는데도 가끔 그 카메라 화면이 떠오릅니다. 이런 영화는 흔하지 않습니다. 잠든 자기 모습이 한 장씩 나오는 그 순간에, 관객은 료타의 6년을 재평가하게 됩니다. 아버지가 됐다는 것은 핏줄이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보낸 시간이 만들어준다는 메시지. 그 시간을 보내지 못한 아버지는 자식이 몰래 찍은 사진 한 장으로 무너질 수 있다는 사실.
이 영화는 두 번 이상 볼 것을 권합니다. 처음 볼 때는 카메라 장면의 충격에 휩쓸리지만, 두 번째부터는 료타가 초반에 던진 대사들이 결말에서 어떻게 뒤집히는지 보이기 시작합니다. 고레에다의 다른 작품들과 함께 보면 그 울림이 훨씬 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