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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이 영화를 봤을 때, 저는 스토리보다 화면에 가득 찬 음식에만 눈이 갔습니다. 영하 54도 남극 기지에서 튀김이라니, 라멘이라니. 그런데 두 번째로 다시 봤을 때는 달랐습니다. 음식 너머로 사람 냄새가 진하게 배어 있었습니다. 극한의 고립감 속에서 인간이 어떻게 버티는지, 그리고 한 그릇의 밥이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2009년작 <남극의 셰프>를 보고 다시 감동을 받았습니다.

고립감이 사람을 어떻게 바꾸는가
영화의 배경은 1997년 일본 남극 돔 후지 기지입니다. 해발 3,810m, 평균 기온 영하 54도. 연안의 쇼와 기지에서 약 1,000km 떨어진 내륙 오지입니다. 펭귄도, 바다표범도, 심지어 바이러스조차 생존할 수 없는 곳이라는 설명이 영화 초반에 나오는데, 제가 처음 들었을 때 그냥 웃어넘겼습니다. 그런데 영화가 진행될수록 그 말이 무겁게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기상학자 대장 카네다, 빙하학자 모토야마, 대기학자 히라바야시, 통신 담당 니시히라, 장비 엔지니어 미코시바, 의료 담당 후쿠다, 대학원생 카와무라, 그리고 조리 담당 니시무라. 이 8명은 전문 분야가 다 다른 사람들입니다. 극지 심리학(polar psychology)이라는 분야가 있는데, 여기서 극지 심리학이란 외부와 단절된 혹한 환경에서 인간의 정서와 집단 역학이 어떻게 변하는지를 연구하는 학문입니다. 영화는 그 교과서 같은 장면들을 하나씩 보여줍니다.
처음에 이들은 사회화된 어른처럼 행동합니다. 예의 바르고, 역할에 충실하고, 갈등을 꾹 눌러둡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균열이 생깁니다. 버터 한 통을 그대로 뜯어 먹는 대원, 꾀병을 부리며 임무를 회피하는 대원, 그리고 그에 격분해 진심으로 쫓아다니는 대원. 제가 이 장면들을 볼 때 묘하게 웃기면서도 등골이 서늘했습니다. 웃음 코드로 처리되어 있지만, 사실 이건 인간이 버틸 수 있는 한계에 다가가는 신호이기 때문입니다.
향수병(homesickness)이 영화의 또 다른 핵심 정서입니다. 여기서 향수병이란 단순히 집이 그립다는 감정을 넘어, 익숙한 환경과 단절될 때 생기는 심리적 고통 반응을 말합니다. 빙하팀원 카와무라는 장거리 연애 끝에 연인에게 이별 통보를 받습니다. 반면 결혼한 대원들은 이혼 통보를 받지 않습니다. 제가 이 부분을 보면서 연애와 결혼이 왜 다른지, 다소 냉정하게 정리가 되는 기분이었습니다. 가족이라는 이름이 붙으면 관계가 다른 방식으로 버텨내는 것 같습니다.
사람이 진짜 이상해지는 건 혼자일 때가 아니라, 8명이서 함께 있는데도 외로울 때입니다. 이 영화가 그 지점을 정확하게 짚었습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말이 있는데, 제가 이 영화를 보고 나서야 그 말이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진짜 생존 조건처럼 느껴졌습니다.
- 극지 심리학 관점에서, 고립 환경에서는 집단 내 소소한 갈등이 증폭되기 쉽습니다
- 영화 속 대원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이성을 조금씩 잃어가며 각자의 본능을 드러냅니다
- 장거리 연애는 관계가 끊어지고, 결혼은 유지됩니다 — 영화가 보여주는 인간관계의 민낯입니다
- 고립감은 혼자일 때가 아니라 함께 있어도 외로울 때 가장 극대화됩니다
밥 한 그릇이 향수병을 달래는 방식
영화 제목이 <남극의 셰프>인 만큼, 음식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건 요리 장면이 아니라, 먹는 장면이었습니다. 게걸스럽다는 표현이 전혀 불쾌하지 않게 느껴지는 희한한 경험이었습니다. 오히려 그 게걸스러움이 인간미로 읽혔습니다.
푸드스타일링(food styling)이라는 개념이 있는데, 음식을 시각적으로 가장 매력적으로 보이도록 구성하고 배치하는 전문 작업을 말합니다. <남극의 셰프> 속 음식들은 <카모메 식당>, <안경>으로 유명한 푸드스타일리스트 이이지마 나오미 씨가 담당했습니다. 플레이팅, 즉 음식을 그릇에 담아내는 구성 방식은 요리의 완성이라고들 하는데, 제가 직접 음식 사진을 찍어본 경험상 그릇 하나, 배치 하나를 섬세하게 신경 쓰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실감합니다. 이이지마 나오미 씨의 작업은 단순히 예쁜 음식이 아니라, 따뜻하고 허기진 음식을 만들어냅니다.
영화 속에서 대원들에게 남극산 대게가 풍족하게 나오는 날이 있습니다. 그런데 대원들은 시큰둥합니다. 고향에 돌아가면 더 비싸게 사 먹어야 할 대게인데도 말입니다. 그날 그들이 원하는 건 대게가 아니라 일본에서 먹던 라멘, 튀김, 가정식이었습니다. 식품 심리학(food psychology) 분야에서는 이를 '음식의 맥락 의존성'이라고 설명합니다. 쉽게 말해, 맛은 혀가 아니라 기억과 감정으로 느끼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 영화는 그 진실을 조용히, 그러나 선명하게 보여줍니다.
조리 담당 니시무라가 대원들이 직접 만든 눅눅한 튀김을 먹고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 있습니다. 영화 초반에 떠나기 전날 아내가 해줬던 튀김이 눅눅했던 장면이 복선으로 깔려 있습니다. 제가 이 장면에서 예상치 못하게 울컥했습니다. 그 눅눅함이 아내의 손맛이고, 집의 냄새이고, 돌아가고 싶은 곳의 감각이었던 거니까요.
니시무라가 없었다면, 그가 만든 일본 가정식이 없었다면, 대원들은 훨씬 더 빨리 무너졌을 겁니다. 니시무라의 역할은 단순한 조리 담당이 아니라, 집단의 심리적 항상성(homeostasis)을 유지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여기서 심리적 항상성이란, 스트레스 환경에서도 정서적 균형 상태를 유지하려는 인간의 내적 기제를 말합니다. 음식이 그 균형을 붙들고 있었던 셈입니다.
실제로 원작자인 니시무라 준은 남극 관측대에서 실제로 조리를 담당했던 인물입니다. 그의 유쾌한 에세이 "재미있는 남극 요리인"이 이 영화의 원작입니다(출처: IMDb - The Chef of South Polar). 사실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라는 점이, 이 영화를 단순한 코미디가 아니라 인간에 대한 기록으로 읽게 만드는 이유 중 하나입니다. 주인공을 맡은 사카이 마사토는 요리 장면을 직접 소화하기 위해 촬영 전 요리 연습에 매진했으며, 오키타 슈이치 감독의 섬세한 연출 덕분에 영화는 무겁지 않으면서도 깊이가 있습니다(출처: eiga.com 영화 데이터베이스).
자주 묻는 질문
Q. 남극의 셰프, 실화 기반인가요?
A. 맞습니다. 실제 남극 관측대 조리 담당이었던 니시무라 준의 에세이 "재미있는 남극 요리인"을 원작으로 합니다. 영화의 유쾌하면서도 현실적인 톤이 바로 이 실화 기반에서 나옵니다. 직접 관련 자료를 찾아봤는데, 에세이 원본도 읽어보고 싶을 정도로 흥미로운 이야기가 많습니다.
Q. 남극의 셰프 촬영은 실제 남극에서 했나요?
A. 아닙니다. 실제 촬영은 남극과 기후가 유사한 일본 홋카이도 아사히카와 지역에서 진행됐습니다. 영하 20도가 넘는 혹한 속에서 배우들이 두꺼운 방한복을 입고 촬영했다고 합니다. 극한의 고립감을 연기하기 위해 배우들이 상당히 고생했다는 후일담이 있습니다.
Q. 영화 속 음식은 누가 스타일링했나요?
A. <카모메 식당>, <안경> 등으로 유명한 푸드스타일리스트 이이지마 나오미 씨가 담당했습니다. 그냥 예쁜 음식이 아니라, 허기지고 그리운 음식처럼 보이게 만드는 게 이분의 특기인 것 같습니다. 음식 영화를 좋아하신다면 이이지마 나오미 씨가 참여한 다른 작품도 찾아보시면 비슷한 느낌을 느끼실 수 있습니다.
Q. 남극의 셰프, 가족 단위로 봐도 괜찮은 영화인가요?
A. 충분히 괜찮습니다. 폭력적이거나 자극적인 장면이 없고, 오히려 가족의 소중함을 담담하게 일깨워주는 영화입니다. 제가 처음 봤을 때는 혼자 봤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함께 간식을 먹으면서 봐도 좋을 것 같습니다.
결론
<남극의 셰프>는 제목만 보면 요리 영화처럼 느껴지지만, 실제로는 인간이 고립 속에서 어떻게 버티는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음식은 그 버팀의 수단이고, 요리사 니시무라는 그 버팀을 가능하게 하는 사람입니다. 제가 이 영화를 두 번 봤는데, 첫 번째와 두 번째에 완전히 다른 영화를 본 기분이었습니다.
2009년작이라는 시간의 간극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 영화이기도 합니다. 남극이라는 배경 자체가 시간을 지우는 공간이기 때문일 겁니다. 일본 영화를 좋아하신다면, 혹은 그냥 따뜻한 밥 한 그릇이 그리운 날이라면, 이 영화를 보시길 권합니다. 저는 다음에 볼 때는 간식을 준비하고 볼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