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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영화가 원작 소설을 얼마나 충실히 옮기는지 반신반의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형에 이르는 병>을 보고 나서 그 의심이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24건의 살인 중 단 1건만 부정하는 연쇄살인범, 그리고 그 살인범의 의뢰를 받아 진범을 추적하는 대학생. 이 황당하면서도 소름 돋는 설정이 실제로 스크린에서 제대로 작동하는지 직접 확인해봤습니다.

질서형 연쇄살인범이라는 설정
일반적으로 연쇄살인범 영화라고 하면 잔혹한 장면을 전면에 내세운 공포물을 먼저 떠올리기 마련입니다. 저도 처음엔 그런 맥락으로 접근했는데, 실제로는 전혀 다른 결이었습니다.
이 영화의 핵심은 '질서형 연쇄살인범(Organized Serial Killer)'이라는 범죄심리학 개념에 있습니다. 여기서 질서형 연쇄살인범이란, 높은 지능과 철저한 사전 계획을 바탕으로 피해자를 선택하고 증거를 은폐하는 유형을 말합니다. FBI 행동과학부가 범죄자 분류 체계에서 정의한 개념으로, 충동적인 '무질서형(Disorganized)'과 대비됩니다(출처: FBI 공식 사이트). 야마토(아베 사다오)가 정확히 이 유형입니다. 빵집 주인으로 7년을 버티며 24명을 살해하는 동안 주변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으니까요.
제가 이 부분에서 가장 소름 돋았던 건, 그가 검거된 뒤 이웃 주민이 남긴 말이었습니다. "그 사람이 나에게 숨겨달라고 했다면, 왠지 숨겨줬을 것 같다"는 증언. 허구의 대사인데도 이게 전혀 낯설지 않았습니다. 우리나라 뉴스에서도 흉악범죄자의 이웃들이 똑같은 말을 하는 장면을 수도 없이 봐왔거든요. '면식범'이라는 단어가 괜히 범죄 통계에서 상위권을 차지하는 게 아닙니다.
아베 사다오의 연기는 이 설정을 완벽하게 구현합니다. <기생수> 시리즈에서 '변신의 귀재'라는 평가를 받은 배우답게, 접견실에서 마사야를 바라보는 눈빛 하나에도 온도가 다릅니다. 선의처럼 보이는 친절함 아래에 완전히 다른 무언가가 깔려 있다는 느낌. 그걸 대사 없이 표정만으로 전달하는 장면에서는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 질서형 연쇄살인범: 높은 지능·철저한 계획·사회적 위장이 특징. 주변에 정상적으로 동화되어 오랜 기간 발각되지 않음
- 야마토의 범행 기간 7년, 피해자 24명은 계획형 범죄자의 전형적 패턴과 일치
- 아베 사다오의 '친절한 사형수' 연기는 이 캐릭터의 이중성을 가장 효과적으로 증폭시키는 요소
살인범에게 동화되는 대학생
일반적으로 원작이 있는 일본 영화는 원작을 충실히 재현한다는 평을 받는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저도 그 말을 들어왔지만 절반쯤은 의심했습니다. 그런데 <사형에 이르는 병>을 보고 나서는 그 평가가 과장이 아니라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원작은 쿠시키 리우 작가의 동명 소설입니다. 이 소설은 출간 당시 '연쇄살인범의 인생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는 듯하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특히 '사이코패시(Psychopathy)' 성향을 가진 인물의 심리 조작 기술을 섬세하게 묘사한 것으로 주목받았습니다. 여기서 사이코패시란 공감 능력 결여, 충동 억제 불능, 타인 조작에 능숙한 반사회적 성격 특성을 가리키는 임상 개념입니다(출처: NIH PubMed Central). 야마토가 마사야에게 접근하는 방식이 정확히 이 메커니즘을 따릅니다.
마사야(오카다 켄시)의 캐릭터가 흥미로운 지점이 여기 있습니다. 그는 처음에 사건을 파헤치는 탐정 역할로 시작하지만, 진실에 가까워질수록 야마토의 논리에 점점 끌려 들어갑니다. 이 과정을 범죄심리학에서는 '전이(Transference)'라고 부릅니다. 전이란 상담이나 접촉 과정에서 한쪽이 상대방의 감정·가치관·사고방식을 무의식적으로 내면화하는 현상입니다. 제가 직접 이 흐름을 따라가다 보니, 마사야가 왜 그 편지를 읽고 '무언가에 홀린 듯' 움직이기 시작했는지 이해가 됐습니다. 오히려 그 선택이 설득력 있게 느껴졌을 정도로요.
오카다 켄시는 TBS 드라마 <첫사랑 일기>에서 신인배우상과 남우조연상을 동시에 수상한 배우입니다. 이 작품에서는 무기력했던 대학생이 살인범에게 조금씩 동화되어가는 변화를 아주 천천히, 그래서 더 무섭게 표현합니다. 제 경험상 이런 내면 변화를 연기로 보여주는 건 베테랑도 어려워하는 영역인데, 신인 배우가 이 정도 밀도를 보여줬다는 건 솔직히 놀라웠습니다.
영화 전체의 분위기는 시종일관 어둡고 눅눅합니다. 그 덕분에 오히려 원작 소설을 읽는 듯한 착각이 들었습니다. 장면보다 심리가 먼저 읽히는 구성이었습니다. 그리고 결말을 마주한 뒤 제가 생각한 건 단순한 영화 감상평이 아니었습니다. 신뢰가 무너지고 의심이 디폴트가 된 시대에, 가장 친절한 사람이 가장 위험할 수 있다는 이 명제가 더 이상 픽션처럼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었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사형에 이르는 병 원작 소설이 영화랑 많이 다른가요?
A. 일반적으로 원작과 영화 사이에 괴리가 크다고 알려진 경우가 많지만, 이 작품은 다릅니다. 쿠시키 리우의 원작 소설이 가진 범죄심리 묘사와 전반적인 서사 구조를 영화가 상당 부분 그대로 가져왔습니다. 소설에서 집요하게 파고들던 야마토의 내면 심리가 영상에서도 충분히 살아있는 편입니다.
Q. 아베 사다오가 이 영화에서 어떤 연기를 보여주나요?
A. <기생수> 시리즈에서 '변신의 귀재'라는 평을 얻은 배우답게, 친절한 빵집 주인과 냉혹한 사형수라는 두 얼굴을 동시에 지닌 야마토를 납득할 수 있게 연기합니다. 특히 접견 장면에서 대사보다 눈빛과 미세한 표정으로 속내를 숨기는 방식이 인상적입니다.
Q. 잔인한 장면이 많은 편인가요? 관람 전에 알고 싶습니다.
A.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에 맞는 수위는 있습니다. 야마토의 과거 범행 장면이 하이라이트처럼 삽입되는데, 직접적인 묘사보다는 분위기와 암시 위주라 관객을 과도하게 불편하게 만들지는 않습니다. 다만 전반적인 톤이 매우 어둡고 심리적 압박감이 강하기 때문에, 고어보다 심리 스릴러 쪽에 가깝다고 보는 게 정확합니다.
Q. 9번째 사건의 진범이 결말에서 밝혀지나요?
A.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직접적인 언급은 피하겠습니다만, 진범 추적 과정에서 드러나는 반전이 단순한 '범인 찾기'로 끝나지 않습니다. 마사야 자신과 주변 인물들에 대한 충격적인 비밀이 겹겹이 쌓여 있어, 결말을 보고 나면 앞 장면들을 다시 떠올리게 됩니다.
결론
제 생각에 일본 심리 스릴러는 '불편한 진실을 얼마나 깊이 파고드느냐'로 완성도가 갈립니다. <사형에 이르는 병>은 그 기준에서 충분히 합격점입니다. 연쇄살인범의 무죄 입증이라는 설정 자체가 이미 도발적인데, 그 설정을 심리 조작과 전이, 사이코패스 같은 범죄심리학적 개념 위에 단단하게 쌓아 올렸습니다.
단순히 자극적인 장면을 보고 싶다면 다른 선택지가 맞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범죄자의 내면 논리와 그 논리에 서서히 끌려드는 인간의 심리, 그리고 신뢰와 의심이 공존하는 지금 이 시대에 대한 씁쓸한 질문을 영화로 받아보고 싶다면, 이 작품은 그 질문을 꽤 진지하게 던집니다. 원작 소설을 먼저 읽고 비교해보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