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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좋아했던 사람의 전화번호를 아직도 외우고 있다는 사실을 문득 깨달은 적이 있습니다. 지웠다고 생각했는데, 손이 먼저 기억하고 있더군요. 왕가위의 〈2046〉을 다시 본 것은 그날 밤이었습니다. 이 영화는 사랑 이야기처럼 포장되어 있지만, 실은 기억이 사람을 어떻게 붙들어두는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차우 모완(양조위)은 떠났지만, 정작 아무데도 가지 못한 남자입니다.

화양연화에서 2046으로
〈2046〉을 처음 봤을 때 솔직히 당혹스러웠습니다. 서사가 친절하지 않고, 인물들이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 설명도 잘 안 해줍니다. 그런데 〈화양연화〉를 먼저 본 뒤 다시 보니 완전히 다른 영화로 보였습니다. 이것은 꽤 드문 일입니다. 전작을 알아야만 비로소 이해가 되는 영화가 있다는 것을 실감했습니다.
〈화양연화〉는 1960년대 초 홍콩을 배경으로 합니다. 이웃들이 좁은 복도에서 수시로 마주칠 수밖에 없는 공간에서, 서로의 배우자가 불륜 관계임을 알아버린 차우와 수리첸. 두 사람은 그 감정을 끝내 꺼내지 못한 채 헤어집니다. 차우가 앙코르와트 사원의 돌벽 구멍에 무언가를 속삭이는 마지막 장면은, 비밀은 그렇게 땅속에 묻어두는 것이라는 오랜 믿음에서 나온 행동입니다. 영화는 그 장면에서 조용히 막을 내립니다.
〈2046〉은 바로 그 이후인 1966년에서 시작합니다. 싱가포르에서 홍콩으로 돌아온 차우는 호텔에서 '2046'이라는 방 번호를 마주칩니다. 〈화양연화〉에서 수리첸과의 기억이 새겨진 바로 그 번호입니다. 그는 그 방을 원했지만 들어가지 못하고, 옆방인 2047호에 짐을 풀고 '2046'이라는 제목의 SF 소설을 쓰기 시작합니다. 너무 가까워서 오히려 더 아픈 거리감. 이 설정 하나가 차우라는 인물의 모든 것을 말해줍니다.
오토픽션(autofiction)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쉽게 말해 작가 자신의 실제 경험을 소설의 형식으로 녹여낸 자전적 픽션입니다. 차우가 쓰는 소설 '2046' 역시 오토픽션의 구조를 가집니다. 소설 속 등장인물들은 차우 자신의 감정이 투영된 거울 같은 존재들이고, 독자는 그 소설과 현실 사이를 오가며 차우의 내면을 간접적으로 읽게 됩니다.
음악이 기억을 복원하는 방식
왕가위 영화에서 음악은 배경이 아닙니다. 저는 이 영화를 볼 때마다 음악이 먼저 감정을 점령하고, 장면은 그 뒤에 따라온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래서 〈2046〉의 음악을 이야기하지 않고 이 영화를 논하는 것은 반쪽짜리 감상이라고 생각합니다.
〈화양연화〉의 메인 테마를 작곡한 시게루 우메바야시(梅林茂)는 〈2046〉에서도 메인 테마를 맡았습니다. 퍼커션으로 시작되는 이 곡은 소설 속 SF 세계의 차갑고 몽환적인 분위기를 선제적으로 구축합니다. 그리고 내레이션 장면에서는 이 테마의 룸바 버전이 쓰이는데, 룸바란 원래 쿠바에서 출발한 라틴 리듬으로 관능적이고 느긋한 흔들림이 특징입니다. 그 느린 박자가 과거를 되감는 회상 장면과 묘하게 맞아떨어집니다. 처음 들었을 때 "이렇게 쓸 수도 있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이 영화에서 가장 오래 남은 음악은 벨리니 오페라 〈노르마〉의 아리아 '카스타 디바(Casta Diva)'입니다. 여기서 '카스타 디바'란 라틴어로 '순결한 여신'을 뜻하며, 달의 여신에게 평화를 기원하는 내용의 소프라노 독창곡입니다. 〈노르마〉는 1831년 초연된 빈첸초 벨리니(출처: Encyclopaedia Britannica)의 걸작 오페라로, 이 아리아는 오페라 역사상 가장 사랑받는 곡 중 하나로 꼽힙니다.
영화에서 이 곡은 동방 호텔 사장이 딸 왕징원의 혼잣말 증세를 가리기 위해 호텔에 늘 틀어놓는 곡으로 등장합니다. 옥상에서 일본어로 혼잣말을 반복하는 왕징원을 차우가 바라보는 장면들, 그리고 결국 그녀가 일본으로 떠나버리는 이별의 순간까지 이 곡이 흐릅니다. 설명 없이 음악만으로 감정을 넘겨주는 방식. 그것이 왕가위의 연출이고, 이 영화가 서사보다 정서로 기억되는 이유입니다.
- 시게루 우메바야시 메인 테마: 소설 속 SF 세계와 현실의 경계를 음악으로 구분
- 룸바 버전 테마: 내레이션·회상 장면에서 과거를 느리게 되감는 효과
- 카스타 디바 (벨리니 오페라 〈노르마〉): 왕징원과의 관계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음악
- 〈아비정전〉의 '피아(Perfidia)': 영화 말미에 삽입되어 왕가위 세계관의 연속성을 표시
타이밍이 어긋난 사람들
차우 주변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단순한 연인 캐릭터가 아닙니다. 저는 조금 다르게 보입니다. 그들은 차우가 어떤 상태에 있는지를 반사해 주는 존재에 가깝습니다. 차우가 변하지 않으니, 그 거울에 비친 상이 달라지는 것뿐입니다.
바이링(장쯔이)은 욕망에 솔직하고 자유로운 인물입니다. 그녀는 차우와 쾌락적인 관계로 시작하지만 진심을 품게 됩니다. 그런데 차우는 그 진심을 받아주지 않습니다. 돈과 감정이 뒤엉킨 이 관계는 차우가 의도적으로 만들어둔 방어기제입니다. 진심을 주고받으면 또다시 상처를 입을 수 있으니까요. 이 장면을 다시 돌려봤는데, 차우의 냉소는 나쁜 의도로 보이지 않고 소진된 감정의 흔적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왕징원(왕페이)은 아버지의 반대로 일본인 타쿠와 강제로 이별한 뒤 혼잣말과 정신증 증세를 보입니다. 왕징원의 혼잣말은 단순한 기벽이 아니라, 이별의 충격이 몸과 언어에까지 새겨진 흔적으로 읽어야 합니다. 차우는 그녀와 타쿠 사이의 비밀 편지를 전달해 주는 역할을 하며 조금씩 그녀를 향한 감정이 생깁니다. 하지만 왕징원이 아버지의 허락을 받고 일본행을 결정하는 순간, 차우는 또 한 번 아무 말도 못 합니다.
"사랑에는 타이밍이 있다. 아무리 마음이 있어도, 타이밍이 맞지 않으면 함께할 수 없다." 영화 속 이 대사는 차우의 독백이자 왕가위의 주제 선언입니다. 〈화양연화〉에서도, 〈아비정전〉에서도 반복된 이 주제는 〈2046〉에서 가장 노골적으로 드러납니다. 차우는 매번 감정을 알아챘을 때는 이미 상대가 결정을 내린 뒤입니다. 늦게 도착하는 사람의 이야기. 저는 이것이 차우만의 이야기가 아니고 우리 모두의 이야기 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기 인용의 과잉인가
〈2046〉에 비판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복잡한 플롯 구조, 그리고 무엇보다 감독 자신의 이전 작품들을 지나치게 많이 끌어온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자기 인용(self-quotation)'이란 작가가 자신의 이전 작품의 이미지, 음악, 장면 구조 등을 의도적으로 재사용하는 창작 방식입니다. 어떤 분들은 이를 세계관의 통일이라고 보고, 다른 분들은 새로운 창작 없이 과거에 기대는 퇴행이라고 봅니다. 저는 두 시각 모두 이해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전자에 조금 더 무게를 두고 싶습니다.
왕가위는 인터뷰에서 〈화양연화〉, 〈아비정전〉, 〈2046〉을 하나의 연속된 작품으로 구상했다고 밝혔습니다(출처: IMDb, 2046 (2004)). 그렇다면 음악과 이미지의 반복은 '인용'이 아니라 '기억의 재생' 그 자체를 형식으로 구현한 것일 수 있습니다. 실제로 저는 이 영화를 볼 때 〈화양연화〉의 특정 장면이 겹쳐 보이는 순간, 차우가 느꼈을 느낌이 전해지는 듯했습니다. 그것이 의도된 연출이라면 굉장히 성공적입니다.
다만 〈화양연화〉나 〈아비정전〉을 보지 않은 채 〈2046〉만 본 관객에게 이 영화가 얼마나 닿을 수 있는지는 솔직히 의문입니다. 전작을 모르면 음악이 왜 이 장면에 쓰이는지, 2046이라는 숫자가 왜 저렇게 무게감을 가지는지 직관적으로 느끼기 어렵습니다. 접근성 문제는 분명히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가위의 영화가 세대를 넘어 회자되는 이유는, 감정의 보편성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누구나 자신만의 '2046'을 하나씩은 가지고 있으니까요.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기억하고 있는 번호처럼, 지워지지 않은 그 무언가 말입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2046 영화, 화양연화 안 보고 봐도 되나요?
A. 볼 수는 있지만, 솔직히 말씀드리면 절반 정도만 보이실 가능성이 높습니다. 차우라는 인물이 왜 그토록 과거에 묶여 있는지, '2046'이라는 숫자가 왜 그렇게 무거운지는 〈화양연화〉를 먼저 봐야 제대로 느껴집니다. 순서대로 보시는 걸 권해드립니다. 〈아비정전〉까지 챙기면 더 좋고요.
Q. 2046 영화에서 카스타 디바가 왜 그렇게 많이 나오나요?
A. 극 중 설정으로는 동방 호텔 사장이 딸의 혼잣말 증세를 감추기 위해 호텔에 항상 틀어두는 곡입니다. 하지만 그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카스타 디바'는 벨리니 오페라 〈노르마〉에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품은 여인이 부르는 아리아입니다. 왕가위는 이 곡을 왕징원과 차우의 감정선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음악으로 활용했습니다. 내용을 알고 나면 장면이 또 다르게 보입니다.
Q. 2046이라는 숫자는 어떤 의미인가요?
A. 여러 층의 의미가 겹쳐 있습니다. 일단 표면적으로는 호텔 방 번호이자 차우가 쓰는 소설의 제목입니다. 역사적으로는 홍콩이 1997년 중국에 반환될 때 "50년간 체제를 유지한다"는 조건이 만료되는 해가 2047년으로, 2046은 그 직전 해입니다. 즉 변화 직전,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 마지막 순간을 상징합니다. 잃어버린 기억이 보존되는 공간이기도 하고, 동시에 그 기억에 갇혀 빠져나오지 못하는 상태이기도 합니다.
Q. 2046에서 바이링(장쯔이)과 왕징원(왕페이) 중 누가 더 비중 있는 인물인가요?
A. 분량만 보면 비슷하지만 서사적 무게는 왕징원 쪽이 조금 더 크다고 보는 시각이 많습니다. 차우가 처음으로 과거의 감정을 넘어 새로운 사람에게 진심을 품는 상대가 왕징원이기 때문입니다. 바이링이 차우의 현재 상태를 보여준다면, 왕징원은 차우가 변할 수 있었던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왕징원이 떠나는 장면이 이 영화에서 가장 쓸쓸하게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결론
〈2046〉이 끝나고 나면 한동안 멍하게 앉아 있게 됩니다. 줄거리가 정리되는 것이 아니라 감정이 천천히 가라앉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저는 이 영화가 젊은 관객에게도, 중년의 관객에게도 각각 다른 방식으로 아프게 느껴진다고 생각합니다. 전자에게는 지금 이 감정이 나중에도 남을 수 있다는 예고처럼, 후자에게는 아직 그 방에서 나오지 못하고 있다는 확인처럼 느껴질 것입니다.
차우는 결국 2046이라는 기억의 방에서 완전히 나오지 못합니다. 그게 이 영화의 결말이고, 어쩌면 왕가위가 가장 솔직하게 인정하는 지점일 것입니다. 사랑은 끝나도, 기억은 언제나 현재형으로 살아남는다는 것. 〈화양연화〉부터 순서대로 보시는 분들, 그리고 오래전에 본 분들도 다시 한번 봐도 좋을 듯합니다. 두 번째 볼 때는 음악에 집중해서 보시면 색다른 영화 한 편을 보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