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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인을 찾는 이야기라기 보다는 왜 그 범죄를 저질렀는지를 말해주는 영화. 저는 이 영화를 보고 엔딩 장면에서 멍하니 있었습니다. 안타깝다고 해야할지, 당연한 결말이라고 해야할지. 완벽한 논리로 쌓아올린 사랑이 결국 그 논리 때문에 무너지는 장면을 보고 나니, 한참동안 말문이 막혔습니다.

와이더닛, 알리바이 트릭
보통 추리물은 "누가 죽였나"를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진실에 도달합니다. 범인을 특정하는 순간 카타르시스가 온다는 게 장르의 오래된 공식이죠. 그런데 이 영화는 처음부터 범인을 보여주고 시작합니다. 관객은 야스코 모녀가 우발적으로 전남편 도가시를 살해했다는 사실을 처음부터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영화가 던지는 화두는 전혀 다른 곳에 있습니다.
여기서 와이더닛(Whydunit)이라는 개념이 등장합니다. 후더닛(Whodunit)이 "누가 했느냐"를 묻는 전통적인 추리 형식이라면, 와이더닛은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느냐"를 서사의 중심에 놓는 방식입니다. 쉽게 말해 범죄 사실보다 그 범죄에 이른 인간의 내면을 해부하는 구조입니다. 원작인 히가시노 게이고(東野圭吾)의 소설은 2006년 제134회 나오키상을 비롯해 본격 미스터리 대상,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1위를 동시에 석권하며 일본 미스터리 소설 3개 부문을 최초로 모두 가져갔는데, 그 이유가 바로 이 구조에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출처: 나오키상 공식 사이트).
이시가미 테츠야는 한때 대학에서 1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천재로 불렸던 수학자입니다. 지금은 낡은 연립주택에서 고등학교 수학 교사로 살아가고 있고, 세상과의 접점은 매일 아침 옆집 도시락 가게에 들르는 짧은 순간뿐입니다. 그가 죽음을 결심했던 그 벼랑 끝에서 야스코 모녀의 사소한 친절이 그를 붙잡았다는 설정은, 이후 그가 저지르는 모든 행위의 심리적 기반이 됩니다.
얇은 벽 너머로 살인의 징후를 감지한 그는 경찰의 수사망을 교란할 알리바이를 설계합니다. 알리바이란 범행 시각에 다른 장소에 있었음을 증명하는 증거를 뜻합니다. 이시가미가 만들어낸 알리바이의 핵심은 야스코 모녀의 알리바이를 진짜로 만들되, 그 알리바이가 대응하는 살인 날짜 자체를 바꿔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처음 이 트릭의 전모를 파악했을 때, 소름이 돋았습니다. 이건 거짓말이 아니었습니다. 수학 문제를 풀 때 전제 자체를 바꿔버리는 것, 기하학 문제인 줄 알고 풀었더니 사실은 함수 문제였던 것과 같은 논리입니다.
그가 노숙자를 유인해 살해하고 도가시의 시신과 바꿔치기한 행위는 윤리적으로 어떤 변명도 성립하지 않습니다. 아무런 관계도 없는 사람을 희생양으로 삼았다는 사실은 그의 헌신이 얼마나 맹목적이고 위험한 방향으로 흘렀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럼에도 그 잔혹함이 한 번에 경멸로 치환되지 않는 건, 영화가 그 행위에 이를 수밖에 없었던 심리적 기저를 조금도 대충 처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 와이더닛 구조: 범인 공개 후 "왜"를 따라가는 역방향 서사
- 알리바이 트릭의 핵심: 날짜를 하루 뒤틀어 진짜 알리바이를 만들어낸 수식
- 이시가미의 심리적 기반: 벼랑 끝에서 받은 사소한 친절이 모든 행위의 출발점
헌신의 윤리, 그 경계에 대하여
이시가미의 헌신을 숭고하다고 보는 시각이 분명히 존재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졌다는 서사는 충분히 감동적으로 읽힐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 영화를 다시 볼수록 그 헌신이 서늘하게 느껴졌습니다. 그 서늘함의 근원을 찾다 보니 결국 한 가지 질문에 닿았습니다. 야스코는 이 헌신을 원했는가.
이시가미는 집안에 마이크를 설치했습니다. 야스코를 스토킹하는 척 연기하며 그녀가 두려움을 느끼게 만들었습니다. 그 두려움조차 그가 설계한 알리바이의 일부였지만, 정작 야스코 입장에서는 전남편에게서 겨우 해방됐더니 이번엔 이웃에게 감시당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제 생각에 선의로 포장된 통제가 노골적인 폭력보다 더 나쁠 수 있습니다. 이시가미의 행위는 야스코를 구한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방식으로 소유한 것에 가까울 수 있습니다.
반면 이 작품이 단순히 스토커의 집착을 미화한다는 비판이 있는데, 저는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영화는 이시가미의 행위를 낭만화하지 않습니다. 미장센(mise-en-scène), 즉 화면을 구성하는 시각 요소들을 통해 그의 공간을 철저히 무채색으로 처리하고, 야스코의 도시락 가게를 따뜻한 주황빛으로 채운 대비는 이시가미가 구원을 갈망했을 뿐 실제로 그것을 이해하지는 못했음을 암시합니다. 그는 삶의 온기를 수학 문제 풀듯 설계하려 했고, 그게 결국 파멸의 시작이었습니다(출처: 일본 영화 데이터베이스).
영화의 또 다른 축은 유카와 마나부입니다. 그는 탐정 갈릴레오라는 별명을 가진 물리학자로, 세상 모든 현상에는 논리적 이유가 있다고 믿는 인물입니다. 그런 그가 이시가미의 트릭을 해체하는 과정은 표면적으로는 추리의 대결이지만, 제가 보기엔 그것보다는 유일하게 서로의 천재성을 알아봤던 두 사람이 우정과 진실 사이에서 겪는 처연한 레퀴엠(requiem)에 가깝습니다. 레퀴엠이란 본래 죽은 자를 위한 진혼곡인데, 이 영화에서는 살아 있는 두 사람이 서로를 위해 연주하는 슬픈 작별처럼 읽힙니다.
설산 등반 장면은 원작 소설에는 없는 장면입니다. 눈보라 속에서 앞서 걷는 이시가미의 뒷모습은 그 어떤 대사보다 많은 것을 말해줬습니다. 정상이라는 완벽한 해답을 향해 수많은 변수를 통제하며 묵묵히 걸어가야 하는 수학의 속성이 그 장면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 장면에서 느낀 건 감탄이 아니라 어떤 안타까움이었습니다. 저 사람은 정상까지 가더라도 그게 무엇인지 이미 알고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세 나라의 리메이크 엔딩이 모두 다르다는 점은 꽤 의미심장합니다. 원작 일본판에서 야스코는 결국 자수하고, 이시가미의 절규로 영화가 끝납니다. 류승범 주연의 한국판에서는 야스코 역의 배우가 자수에 이르지 못합니다. 어느 쪽이 더 현실적이냐는 질문보다, 어느 쪽이 더 정직하냐는 질문이 저는 더 흥미롭습니다. 야스코의 자수는 이시가미의 완벽한 논리를 감정이 무너뜨리는 순간인데, 그 붕괴를 허용하느냐 마느냐는 각 나라가 사랑과 죄책감을 어떻게 바라보는지와 연결되는 것 같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용의자 X의 헌신 원작 소설이랑 영화랑 많이 다른가요?
A. 핵심 트릭과 서사 구조는 동일하지만, 영화에는 원작에 없는 설산 등반 장면과 드라마 갈릴레오 시리즈 캐릭터인 우츠미 카오루(시바사키 코우)가 추가됐습니다. 원작이 인물의 내면을 문장으로 따라가는 방식이라면, 영화는 미장센과 색채 대비로 그 감정을 시각화하는 방식이라 제가 보기엔 두 작품이 서로를 보완하는 느낌입니다.
Q. 이시가미의 알리바이 트릭이 정확히 어떻게 되는 건가요?
A. 야스코 모녀가 도가시를 살해한 날은 12월 1일입니다. 그런데 이시가미는 그 다음 날인 12월 2일, 노숙자를 살해하고 시신에 도가시의 흔적을 심어 유기했습니다. 경찰이 발견한 시신은 도가시가 아니라 노숙자였고, 야스코 모녀의 12월 2일 알리바이는 완벽히 사실이었습니다. 실제로 그녀들은 12월 2일에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니까요. 이게 이 영화에서 가장 소름 돋는 부분입니다.
Q. 한국 리메이크판은 어떻게 다른가요?
A. 류승범이 이시가미 역을 맡았고, 야스코 역은 백화선이 연기했습니다. 가장 큰 차이는 엔딩인데, 한국판에서 야스코는 끝까지 자수하지 못합니다. 원작보다 덜 비참한 결말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지만, 반대로 죄책감을 안고 살아가는 그 삶이 오히려 더 긴 형벌일 수 있다는 해석도 있어서 저는 어느 쪽이 더 낫다고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Q. 이 영화가 이시가미의 스토킹을 미화하는 거 아닌가요?
A. 그렇게 보이는 부분이 분명히 있고, 그 지적이 완전히 틀리지는 않습니다. 다만 제가 여러 번 보면서 느낀 건, 영화 자체는 이시가미의 행위를 영웅적으로 연출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의 집착이 야스코를 실제로 두렵게 만든다는 사실을 화면에서 직접 보여주고, 유카와의 뼈아픈 대사와 야스코의 자수로 그 한계를 명확히 드러냅니다. 낭만화가 아니라 해부에 가깝다는 게 제 판단입니다.
결론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 저는 이시가미가 안타까웠습니다. 두 번째 봤을 때는 야스코가 안타까웠습니다. 세 번째 봤을 때는 노숙자가 생각났습니다. 볼 때마다 시선이 달라진다는 건, 그만큼 이 작품이 어느 한 방향으로 결론을 강요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2008년 일본 개봉 당시 4주 연속 박스오피스 1위, 총 49억 엔이 넘는 흥행 수익을 기록한 것은 이 영화가 단순히 미스터리를 좋아하는 관객만 끌어모은 게 아님을 보여줍니다. 논리와 감정 사이에서, 헌신과 통제 사이에서, 구원과 파멸 사이에서 스스로 판단해야 하는 그 불편함이 오히려 이 영화를 오래 기억하게 만드는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미스터리 영화를 찾는다면 이 작품을 먼저 보고, 원작 소설도 함께 읽어보길 권합니다. 두 매체가 같은 이야기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전달하는 경험 자체가 꽤 흥미롭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