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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이 된다는 게 정말 성장한 것일까요. 저는 이 영화를 보고 나서 한동안 그 질문을 머릿속에서 떨쳐낼 수가 없었습니다. 영화 <우리는 모두 어른이 될 수 없었다>는 2021년 공개 직후 잔잔하게, 그러나 꽤 깊숙이 마음을 건드렸던 작품입니다. 광고와 뮤직비디오로 영상 감각을 쌓아온 모리 요시히로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완성도 있는 연출이었습니다.

시간을 거꾸로 걸어가는 남자의 이야기
처음엔 이 영화가 '그냥 첫사랑 회상 멜로드라마겠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시작하자마자 예상이 완전히 빗나갔습니다.
영화는 역연대기적 구성(reverse chronological structure), 그러니까 현재에서 과거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방식으로 서사를 이어갑니다. 여기서 역연대기적 구성이란 결말에서 출발해 점점 원인을 향해 파고드는 이야기 방식으로, 관객이 주인공의 현재 상태를 먼저 목격하고 그 뒤 '왜 이렇게 됐는가'를 추적하게 만드는 구조입니다. 처음엔 이 방식이 낯설어서 약간 버벅였습니다.
2020년의 마흔여섯 사토(모리야마 미라이)가 페이스북 타임라인에서 옛 연인 카오리의 이름을 발견하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제가 보면서 느낀 건, 그 순간 사토의 표정이 딱히 반가움도 슬픔도 아닌 묘한 공허함이었다는 점이었습니다. 20년 넘게 TV 텔롭(자막) 제작 회사에서 일해 온 중년 남자가 SNS 피드 하나에 굳어버리는 그 감각, 어딘가 낯설지 않았습니다.
원작은 일본 웹소설 플랫폼 케이크스(cakes)에서 연재되어 베스트셀러에 오른 작가 모에가라(燃え殻)의 자전적 소설입니다. 각색은 영화 <소공녀>의 시나리오 작가 다카다 료(高田亮)가 맡았는데, 원작의 파편적인 에피소드들을 하나의 밀도 있는 영화적 언어로 묶어내는 솜씨가 상당했습니다. 특히 이 영화에만 등장하는 오리지널 캐릭터 메구미(오오시마 유코)를 추가한 건 탁월한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 40대 사토의 감정적 미성숙이 훨씬 선명하게 드러났으니까요.
- 장르: 로맨스 / 휴먼 드라마 (넷플릭스 오리지널 + 일본 극장 동시 공개)
- 출시일: 2021년 11월 5일 / 러닝타임: 124분 / 등급: 15세 이상
- 원작: 모에가라(燃え殻) 동명 자전적 소설 / 각색: 다카다 료(高田亮)
- 주연: 모리야마 미라이(森山未來), 이토 사이리(伊藤沙莉)
포스트버블 세대의 초상, 그 쓸쓸한 온도
이 영화를 온전히 즐기려면 사실 한 가지 배경을 조금 알고 가는 게 좋습니다. 바로 포스트버블(post-bubble) 세대라는 맥락입니다. 여기서 포스트버블이란 1980년대 말 일본의 자산 버블이 붕괴한 이후 찾아온 장기 경기 침체기, 흔히 '잃어버린 10년(失われた10年)'이라 불리는 시대를 살아간 세대를 가리킵니다. 경제 성장의 신화가 꺼진 자리에서 꿈을 품었던 젊은이들이 서서히 체념을 배워가던 시절이죠(출처: 일본은행(Bank of Japan) 경제 동향 자료).
제가 한국인으로서 이 시대적 배경을 100% 체감하기는 어려웠습니다. 시부야계(渋谷系) 음악이라는 90년대 일본 특유의 도시적 팝 감성이나, 오자와 켄지(小沢健二)의 앨범 이름에서 따온 카오리의 필명 이누캬라(犬キャラ) 같은 장치들은 당시 문화를 아는 분들에게 훨씬 깊은 향수를 자극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제가 이 영화에서 묵직하게 맞은 지점은 따로 있었습니다. 텔롭 노동이라는 설정이었습니다. 사토는 소설가를 꿈꿨지만 결국 타인의 이야기를 장식하는 자막 타이피스트로 20년을 보냅니다. 이 설정은 단순한 직업 묘사가 아니라, 창작적 소외(creative alienation)를 시각화한 장치입니다. 창작적 소외란 자신의 고유한 표현 의지가 시스템의 부속품으로 전락하는 상태를 뜻하는데, 사토가 매일 두드리는 자판 위에는 정작 그 자신의 말이 단 한 줄도 없다는 아이러니가 이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 의식이기도 합니다.
미장센(mise-en-scène), 즉 화면 안에 담긴 모든 시각적 요소의 배치도 인상적이었습니다. 후지 필름 감성의 색온도, 90년대를 재현한 조명의 촌스러운 온기, 배우들이 내뿜는 담배 연기가 화면 속 공허함을 조용히 채워가는 방식. 이 비주얼 언어는 광고와 뮤직비디오를 해온 감독의 내공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부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평범하다는 낙인, 그리고 진짜 성장의 얼굴
이 영화에서 가장 오래 남은 장면을 고르라면 저는 망설임 없이 마지막 회상 시퀀스를 꼽겠습니다. 보는 내내 왜 그 장면에서 울컥했는지 보고 나서도 한동안 정리가 안 됐습니다.
카오리(이토 사이리)가 사토에게 남긴 "정말 평범한 것 같아"라는 말은 단순한 이별 대사가 아닙니다. 이 한 문장이 사토의 이후 20년을 지배하는 실존적 낙인으로 작동합니다. 사토는 이 낙인에서 벗어나려 몸부림치지만, 그 과정에서 정작 눈앞의 현실을 외면하게 됩니다. 40대에 만난 메구미가 진심 어린 사랑을 내밀 때도, 사토의 내면을 가득 채운 카오리라는 환상의 크기가 현재의 감정을 지워버리고 맙니다.
영화 심리학적으로 보면 이는 이상화된 과거에 대한 집착이 현재 관계를 방해하는 전형적인 정서적 미성숙(emotional immaturity) 패턴입니다. 여기서 정서적 미성숙이란 과거의 감정 경험이 현재의 자아와 통합되지 못해 반복적으로 현재를 간섭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사토는 스물한 살에도 마흔여섯에도 결국 그 패턴 안에 머물고 있었던 것입니다(출처: American Psychological Association(APA) 정서 발달 관련 자료).
그런데 영화는 이 지점에서 비난하거나 설명하려 들지 않습니다. 그냥 보여줍니다. 2020년 코로나로 굳게 닫힌 새벽 도쿄의 거리를 사토가 홀로 걸어가는 마지막 장면. 기억의 소음들이 잦아들고,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지만 이제 그것을 들고 걷겠다는 사토의 뒷모습. 제 생각에 진짜 울림 있는 영화는 결말에서 답을 주지 않고 질문을 남기는 쪽인데, 이 영화가 딱 그랬습니다.
아쉬운 점도 분명히 있었습니다. 카오리, 메구미, 수(스미레)라는 세 여성 인물이 모두 사토의 감정 지형도를 설명하는 역할에 머문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려웠습니다. 이들 각자의 이야기가 조금 더 펼쳐졌더라면, 사토만의 이야기가 아닌 그 시대를 함께 버텨온 모두의 이야기가 됐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높은 평점을 받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특별하지 않은 이야기를, 특별하게 느끼게 만드는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넷플릭스에서 지금도 볼 수 있나요?
A. 2021년 11월 넷플릭스 오리지널로 공개된 작품으로, 넷플릭스 라이브러리 정책에 따라 서비스 여부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제가 처음 봤을 때는 한국 넷플릭스에서 한국어 자막과 함께 정상적으로 감상할 수 있었습니다. 현재도 넷플릭스에서 감상 가능합니다.
Q. 일본 문화나 시대 배경을 모르면 재미없나요?
A. 솔직히 시부야계 음악이나 90년대 일본 문화에 익숙한 분이라면 훨씬 깊이 공감하실 겁니다. 제 경우엔 그 배경을 잘 알지는 못했지만, 꿈과 현실 사이에서 마모되는 감정은 충분히 공감했습니다. 일본 문화에 친숙하지 않아도 청춘과 이별, 중년의 허탈함이라는 보편적 감정선을 따라가는 데는 무리가 없었습니다.
Q. 영화 구성이 복잡하다는데, 따라가기 어렵지 않나요?
A. 역연대기적 구성 때문에 초반 30분 정도는 자막의 연도 표시를 꼭 확인하면서 보는 게 좋습니다. 제가 처음 볼 때 잠깐 흐름을 놓쳐서 다시 돌려본 장면이 몇 군데 있었습니다. 다만 어느 시점부터는 자연스럽게 적응이 되고, 오히려 이 구조 덕분에 사토라는 인물의 감정이 훨씬 입체적으로 느껴졌습니다.
Q. 모리야마 미라이 연기가 정말 좋은가요?
A. 제 생각에 이 배우의 연기는 정말 예상 밖이었습니다. 스물한 살의 설레던 사토와 마흔여섯의 무감각한 사토를 같은 몸으로 구현하는데, 대사보다 눈빛과 몸의 무게감으로 세월을 표현하는 방식이 인상적이었습니다. 특히 마지막 회상 장면에서 그의 표정은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
결론
이 영화를 한 줄로 정리하면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특별해야 한다는 강박이 얼마나 오래, 얼마나 깊이 한 사람을 묶어둘 수 있는가'를 124분 동안 조용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라고요.
거창한 사건도, 극적인 화해도 없습니다. 그냥 한 남자가 SNS 피드를 스크롤하다가 오래된 이름 하나를 발견하고, 그 이름이 열어버린 문 안으로 혼자 걸어 들어갔다가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게 이상하게 오래 마음에 남았습니다. 화면을 닫고 나서도 한동안 지나온 시절의 어떤 장면들이 불쑥불쑥 떠올랐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