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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더운 여름 소파에 늘어져 있다가 '중경삼림'이라는 제목을 보고 무심코 영화를 보기 시작했습니다. OST는 귀에 익은데 정작 한 번도 본 적 없던 영화였는데, 30년이 지난 지금 봐도 전혀 촌스럽지 않았습니다. 오래전 홍콩 여행 중 느꼈던 그 축축하고 역동적인 감성이 그대로 스크린에 담겨 있는 듯 해서 좋았습니다. 이 영화는 멜로인 듯, 멜로가 아닌 듯 묘한 매력이 있는 옴니버스 영화입니다.


청킹 맨션과 홍콩 반환
영화 제목인 '중경삼림(重慶森林)'을 직역하면 '중경의 빌딩 숲'입니다. 중경, 즉 청킹(Chungking)은 홍콩 중심가에 위치한 지역으로, 악명 높은 청킹 맨션이 자리한 곳입니다. 여기서 청킹 맨션이란 1960년대 지어진 복합 건물로, 이민자·여행자·노점상이 뒤섞인 홍콩에서 가장 혼잡한 공간 중 하나입니다. 제가 실제로 홍콩에 갔을 때 제니쿠키 사러 안에 들어가 본 적이 있는데, 낙후된 분위기가 상당했습니다. 그 좁고 어두운 공간이 어떻게 영화의 무대가 됐는지 놀라웠습니다.
왕가위 감독이 이곳을 선택한 것은 단순한 로케이션 결정이 아니었습니다. 영화의 배경은 1994년, 홍콩의 중국 반환을 딱 3년 앞둔 시점이었습니다. 홍콩 반환(Hong Kong Handover)이란 1997년 7월 1일, 영국 식민지였던 홍콩의 주권이 중국으로 이양된 역사적 사건을 말합니다. 당시 홍콩은 영국식 법체계와 자본주의 경제 덕분에 아시아 금융 허브로 눈부신 성장을 구가하고 있었고, 그만큼 반환 이후의 불안도 컸습니다.
출처: History.com — Hong Kong Handover에 따르면, 반환 전 수십만 명의 홍콩 시민이 영국·호주·캐나다 등지로 이민을 떠났습니다. 남은 이들은 그 빈자리를 보며 더 깊은 불안을 느꼈습니다. 왕가위는 바로 그 감정, 즉 번성했지만 이미 쇠락이 시작된 청킹이라는 공간에 그 시대의 불안을 겹쳐 놓은 것입니다. 화려한 금발 가발과 레인코트를 걸친 임청하의 마약 밀매업자 캐릭터가 영국과 홍콩을 동시에 상징한다는 해석도 이 맥락에서 나옵니다.
제가 홍콩을 구석구석 걸어 다니며 느낀 것은, 도시는 얼핏 음산하고 어두운데 전체적인 분위기는 묘하게 역동적이라는 점이었습니다. 어디서 사진을 찍어도 느낌이 살아있는 도시입니다. 30년 전에도 같은 분위기였다니, 그 시절 전 세계가 왜 홍콩에 열광했는지 영화를 보며 실감했습니다.
- 청킹 맨션: 홍콩 중심가 침사추이에 위치한 1960년대 복합 건물, 이민자·배낭여행자의 집결지
- 홍콩 반환 D-3년: 1994년 당시 홍콩인들의 정체성 불안과 이주 러시가 사회 분위기를 지배
- 임청하의 금발 가발: 영국(금발)과 홍콩(아시아 여성)의 혼재를 한 캐릭터에 압축한 시각적 장치
- 쇠락한 중심지: 번성했다가 낙후된 청킹의 풍경이 '사랑의 유통기한'이라는 주제와 맞닿음
유통기한이라는 장치
이 영화를 옴니버스 형식인지 모르고 봤던 터라 전반부가 끝나고 완전히 다른 인물들이 등장했을 때 당황했습니다. 옴니버스(Omnibus) 영화란 독립된 이야기 여러 편을 하나의 작품으로 엮은 구성 방식을 말하는데, 중경삼림은 두 이야기 사이에 미드나잇 익스프레스라는 가게를 접점으로 느슨하게 연결해 놓습니다. 그리고 두 이야기를 관통하는 공통 장치가 바로 '유통기한'입니다.
첫 번째 이야기에서 경찰 223(금성무)은 만우절에 이별 통보를 받습니다. 그는 그것이 농담이길 바라는 마음에서 유통기한이 5월 1일인 파인애플 통조림을 매일 한 캔씩 사들입니다. 전 여자친구 메이가 가장 좋아하던 과일이 파인애플이었고, 5월 1일은 그의 생일이기도 합니다. 30개가 되는 날까지 그녀가 돌아오지 않으면 모든 걸 잊겠다는, 스스로에게 한 약속이었습니다. 결국 30번째 통조림을 손에 넣은 날 그는 전부 먹어치우고, 처음 들어오는 사람을 사랑하기로 결심합니다. 그렇게 금발 가발의 여인과 하룻밤을 보냅니다.
두 번째 이야기의 경찰 663(양조위)에게도 유통기한 비슷한 감각이 흐릅니다. 스튜어디스 전 여자친구가 남긴 편지를 읽지 못한 채 집 안 사물들에게 말을 걸며 시간을 보내는 그의 모습은 이별을 처리하지 못한 사람의 전형처럼 보입니다. 비누에게 "너, 많이 수척해졌구나. 자신감을 좀 가져"라고 말하는 장면은 웃기면서도 짠했는데, 결국 비누에게 건네는 말이 자신에게 하고 싶은 말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더 마음이 쓰립니다.
출처: The Criterion Collection — Chungking Express에서도 이 영화의 핵심을 "시간과 기억에 대한 집착"으로 분석합니다. 경찰 223(금성무)의 대사가 그것을 압축합니다. "모든 것에 유통기한이 있다. 기억이 통조림에 들었다면 나는 기한이 영영 지나지 않기를 바란다. 꼭 기한을 적어야 한다면, 내 사랑에도 유통기한이 있다면 나는 만 년으로 하고 싶다." 감정의 소멸을 받아들이되, 그 감정이 영원하길 바라는 모순된 마음을 이보다 더 잘 표현할 수 있을까 싶었습니다.
저는 이 장치가 단순한 감정 연출이 아니라 상당히 정밀하게 설계된 내러티브 구조라고 생각합니다. 두 이야기 모두 이별 후 새로운 사람이 예기치 않게 들어오는 구조를 반복하면서, 감정에도 주기가 있고 그 주기가 끝나야만 다음이 온다는 메시지를 조용히 심어놓습니다.
캘리포니아 드리밍과 페이
이런 옴니버스 영화는 보통 한쪽 이야기가 더 강하게 남습니다. 중경삼림에서 저는 단연 두 번째 이야기, 경찰 663(양조위)과 페이(왕페이) 편이었습니다. 사물과 대화하는 귀여운 이별 후유증 장면들이 많기도 했고, 'California Dreamin''이 그 공간을 가득 채우는 방식이 기분 좋게 시끄러웠거든요.
페이라는 캐릭터는 독특합니다. 가게에서 'California Dreamin''을 크게 틀어놓고 일하면서, "시끄러울수록 좋아요. 머리를 비울 수 있거든요"라고 말합니다. 충동적으로 663의 열쇠를 챙겨 몰래 집을 드나들고, 전 여자친구의 흔적을 하나씩 지워나가고, 어항 금붕어를 채워 넣고, 자신의 어릴 적 사진을 거울에 붙여 놓습니다. 이 모든 행동을 그녀는 "몽유병 같은 것"이라고 합리화합니다. 여기서 몽유병이라는 표현이 단순한 비유가 아닌 것이, 페이 자신도 자기 행동의 의미를 온전히 의식하지 못한다는 뜻으로 읽힙니다. 사랑이 시작되는 방식이 늘 논리적이지 않다는 것을 이 캐릭터가 몸으로 보여주는 셈입니다.
그리고 그 유명한 엔딩. 페이가 663에게 보낸 편지는 비에 번져버려 행선지가 지워진 티슈 항공권입니다. 탑승 날짜는 1년 후. 663이 그걸 읽지 못했다고 오해한 채 시간이 흐르고, 정확히 1년 뒤 스튜어디스 복장의 페이가 술집 캘리포니아에서 그를 기다립니다. 그리고 그가 그 가게를 인수해 있었다는 사실. 저는 보면서도 "이게 말이 돼?"라는 생각과 "이게 영화지"라는 생각이 동시에 들었습니다.
663이 새 항공권을 어디로 그려줄지 물을 때 "아무 곳이나, 당신이 원하는 곳이면"이라고 대답하는 장면은 이별 후유증으로 사물에게 말 걸던 그 남자가 맞나 싶을 정도로 달라 보였습니다. 감정의 유통기한이 만료된 자리에 새로운 감정이 들어올 수 있다는 것, 이 영화는 그것을 억지 없이 보여줍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중경삼림은 왜 옴니버스 형식인가요?
A. 왕가위 감독이 원래 찍던 영화 작업 도중 기분 전환으로 빠르게 촬영한 작품입니다. 두 이야기는 독립적이지만 미드나잇 익스프레스라는 가게를 접점으로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옴니버스 구성 덕분에 '사랑의 유통기한'이라는 주제를 서로 다른 방식으로 두 번 보여주는 효과가 납니다.
Q. 임청하 캐릭터의 금발 가발에 무슨 의미가 있나요?
A. 금발은 영국을, 아시아 여성의 외모는 홍콩을 상징하는 이중적 이미지로 해석됩니다. 1994년 홍콩 반환을 3년 앞둔 시점에서, 영국식 정체성을 걸치고 있는 홍콩인의 불안한 자화상을 그 캐릭터에 담았다는 시각이 일반적입니다. 처음 봤을 때는 그냥 튀는 패션이라고 생각했는데, 배경을 알고 나면 의상 하나가 완전히 다르게 보입니다.
Q. 중경삼림 OST '몽중인'과 'California Dreamin''은 어느 장면에서 나오나요?
A. 둘 다 두 번째 이야기인 경찰 663(양조위)과 페이(왕페이) 편에서 등장합니다. 특히 'California Dreamin''은 페이가 미드나잇 익스프레스에서 크게 틀어놓고 일하는 장면부터 663의 집을 몰래 드나드는 장면까지 반복적으로 흐르며 영화의 정서를 대표하는 음악이 됩니다.
Q. 파인애플 통조림 유통기한 5월 1일에 특별한 의미가 있나요?
A. 5월 1일은 경찰 223(금성무)의 생일입니다. 만우절인 4월 1일에 이별 통보를 받은 그가 그것이 한 달짜리 농담이길 바라는 마음으로 5월 1일까지 유통기한이 남은 파인애플 통조림을 모읍니다. 파인애플은 전 여자친구 메이가 가장 좋아하던 과일이기도 해서, 통조림 자체가 그 관계의 감정을 저장한 상징물로 기능합니다.
결론
영화가 끝나고 한동안 경찰 223의 대사가 머릿속을 맴돌았습니다. "영원한 건 절대 없을까?" 저는 오히려 이렇게 생각합니다. 영원한 게 꼭 좋을까요? 유한하기 때문에 우리는 이토록 서로와의 시간을 아까워하고 애달파하는 것은 아닐까요. 유통기한이 있는 파인애플 통조림처럼, 끝이 있어서 사랑이 더 아름다운 것 같습니다.
30년 전 영화인데도 지금 봐도 전혀 오래된 느낌이 없습니다. 홍콩에 다시 가고 싶어 졌고, 청킹 맨션도 이번엔 제대로 둘러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직 보지 않은 분들이라면 한 번쯤 보시길 권합니다. 습하고 뜨거운 계절이 이 영화의 정서와 묘하게 잘 어울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