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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을 가족보다 철도에 먼저인 남자, 과연 그걸 직업정신이라 불러야 할까요, 아니면 도피라 불러야 할까요. 1999년에 개봉한 후루하타 야스오 감독의 영화 「철도원」을 처음 봤을 때 저는 그 질문조차 떠올리지 못했습니다. 그냥 눈물만 흘렸거든요. 근데 세월이 지나서 다시 보니, 이 영화가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는 걸 뒤늦게 알게 됐습니다.

쇼와 직업윤리
영화를 다시 보게 된 건 우연이었습니다. 유튜브 알고리즘이 알려줘서 티빙에서 봤는데, 시작하고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오토마쓰가 플랫폼에서 깃발을 드는 그 장면 때문이었어요. 죽은 딸을 안고 돌아오는 열차를 향해서 말입니다.
당시에는 그 장면이 '대단한 프로 정신'으로 보였습니다. 지금은 다르게 보입니다. 오토마쓰는 철도를 선택한 게 아니라, 시대가 그에게 그 선택을 요구했고 그는 그걸 의심할 줄 몰랐던 겁니다.
이 영화의 배경을 이해하려면 '잇쇼켄메이(一所懸命)'라는 개념을 짚고 가야 합니다. 잇쇼켄메이란 한 곳에 목숨을 건다는 뜻으로, 일본 무사 계층에서 자신이 주군에게 받은 영지를 목숨으로 지킨다는 정신에서 비롯된 말입니다. 쉽게 말해 '내 자리를 버리는 것은 죽음과 같다'는 사고방식입니다. 오토마쓰가 딸이 아파 병원으로 가는 열차를 향해 깃발을 흔든 건, 무책임이 아니라 이 잇쇼켄메이의 논리로 자기 자신을 설득한 결과였습니다.
거기에 시대적 맥락이 더해집니다. 1987년 일본국유철도(JR)가 민영화되기 전까지, 철도원은 국가 기간산업의 일꾼이었습니다. 오토마쓰가 젊은 시절 증기기관차를 몰던 시대는 홋카이도 탄광 산업이 한창 활기를 띠던 때였습니다. 석탄을 실어 나르는 철도는 일본 전후 경제 부흥의 핏줄이었고, 그 철도를 지키는 사람은 공동체의 중추였습니다. 오토마쓰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2대째 철도원이 된 인물입니다. 그 자부심과 의무감이 몸에 완전히 배어 있는 사람이었던 거죠.
하지만 그 시대는 이미 끝나 있었습니다. 오토마쓰가 역장으로 있는 호로마이선은 폐선을 앞두고 있었고, 마을은 탄광이 문을 닫으면서 이미 쇠퇴한 상태였습니다. 그의 친구 스기우라 센지는 철도 밖으로 걸어 나갈 준비를 합니다. 퇴직 후 호텔 관련 중역 자리로 이동할 계획이었죠. 하지만 오토마쓰에게 그런 전환은 불가능에 가까운 이야기였습니다. 철도의 언어 밖에서 자신을 설명할 방법을 그는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제가 이 영화를 보면서 가장 마음이 무거웠던 부분이 바로 이 지점입니다. 오토마쓰는 나쁜 사람이 아닙니다. 시대가 요구한 역할에 그 누구보다 충실했을 뿐인데, 그 충실함이 그를 철도에 가두어버린 겁니다.
- 잇쇼켄메이(一所懸命): 한 자리를 목숨처럼 지킨다는 일본 무사 계층의 직업 윤리
- 1987년 일본국유철도 민영화 이후 지방 노선 폐선이 본격화됨
- 홋카이도 탄광 산업의 몰락과 함께 호로마이선 같은 지방 철도도 함께 쇠퇴
- 오토마쓰는 철도 바깥의 삶에 대한 언어를 끝내 갖지 못한 인물
호로마이역
솔직히 말하면, 유키코의 정체가 밝혀지기 전까지 저는 이 영화를 꽤 냉정하게 보고 있었습니다. '이 정도 이야기는 예상 범위 안이네' 싶었거든요. 그런데 오토마쓰가 전화를 끊고 안색이 변하는 그 순간, 저도 모르게 숨을 참고 있었습니다.
죽은 딸이 세 자매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이 장면은, 일종의 임사 체험(臨死體驗) 모티프로 읽힙니다. 임사 체험이란 죽음에 가까워진 상태에서 삶의 중요한 기억이나 인물들이 눈앞에 펼쳐지는 현상으로, 영화는 이 모티프를 활용해 오토마쓰가 함께하지 못한 시간을 한꺼번에 보여줍니다. 태어나 두 달 만에 세상을 떠난 딸이 여섯 살이 되고, 초등학교 6학년이 되고, 고등학생이 되어 나타납니다. 오토마쓰가 단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모습들입니다.
제가 이 장면에서 가장 먹먹했던 건 히로스에 료코가 연기한 고등학생 유키코가 오토마쓰를 위해 국을 끓이는 장면이었습니다. 아무 말 없이 부엌에 서서 국을 끓이는 딸의 뒷모습. 오토마쓰는 그걸 그냥 지켜봅니다. 17년 결혼 끝에 얻어 두 달 만에 잃은 딸이 건네는 밥 한 그릇이잖아요. 그 무게가 대사 한 마디 없이 전달됐습니다.
그리고 오토마쓰가 유키코에게 묻습니다. "왜 사실대로 말하지 않았니?" 유키코의 대답은 "아빠가 무서워할까 봐요." 이 대사에 가슴이 미어졌습니다. 딸이 아버지를 걱정하는 말인데, 그 걱정 안에 오토마쓰가 평생 가족에게 얼마나 낯선 존재였는지가 다 담겨 있습니다. 오토마쓰의 "세상에 자식이 무서운 부모가 어디 있겠니"라는 대답은 짧지만, 그 짧음 속에 평생 말하지 못한 미안함이 폭발하는 느낌이었습니다.
원작 소설은 아사다 지로의 동명 단편으로 1997년 나오키상(直木賞)을 수상했습니다. 나오키상은 일본에서 대중문학 분야의 권위 있는 문학상으로, 수상작은 영화화되거나 드라마화되는 경우가 많습니다(출처: 문예춘추 나오키상 공식 페이지). 소설이 오토마쓰의 내면과 회상을 압축적으로 담아냈다면, 영화는 그 여백을 섬세하게 채워 넣었습니다. 특히 센지와 오토마쓰의 대화 장면들은 영화에서 더 풍성해졌는데, 덕분에 오토마쓰가 어떤 사람인지가 입체적으로 전해집니다.
촬영지였던 홋카이도 이쿠토라역은 1902년 개업 이후 100년 넘게 운행되다가 2024년 실제로 폐선됐습니다. 그런데 역 자체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역명을 영화 속 이름 그대로 '호로마이역'으로 바꾸고, 촬영 당시 세트를 보존해 현재는 영화 기념 관광지로 운영 중입니다. 이쿠토라역이 호로마이역이 된 셈인데, 이게 저는 매우 일본스럽다고 느꼈습니다. 사라진 것을 없애지 않고 기억으로 붙잡아두는 방식이요(출처: JR 홋카이도 공식 사이트).
영화는 1999년 아시아 태평양 영화제에서 수상했고, 일본 아카데미 최우수작품상도 받았습니다. 주연 타카쿠라 켄은 이 작품으로 배우 인생의 집대성을 보여줬고, 히로스에 료코는 유키코 역으로 국민 배우 반열에 올랐습니다. 제가 두 번째로 봤을 때 타카쿠라 켄의 연기를 다시 들여다봤는데, 표정보다 눈빛과 뒷모습으로 다 말하는 방식이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을 새삼 했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영화 철도원 촬영지 지금도 갈 수 있나요?
A. 네, 현재도 방문 가능합니다. 홋카이도에 위치한 이쿠토라역은 2024년 폐선 이후 역명을 영화 속 이름인 '호로마이역'으로 변경하고, 촬영 당시 세트를 그대로 보존해 관광 명소로 운영 중입니다. 제가 직접 다녀온 건 아니지만, 실제 방문자들 후기를 보면 영화 속 설경과 역사 분위기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고 합니다.
Q. 유키코가 세 자매로 나오는 이유가 뭔가요?
A. 생후 두 달 만에 세상을 떠난 딸이 성장하면 어떤 모습이었을까를 보여주기 위한 장치입니다. 여섯 살 아이, 초등학교 6학년 소녀, 고등학생 세 모습으로 차례차례 나타나며 오토마쓰가 끝내 함께하지 못한 성장 과정을 마지막으로 채워줍니다. 임사 체험 모티프를 활용한 것으로, 세 배우가 각각 다른 나이대의 유키코를 연기합니다.
Q. 원작 소설과 영화 중 어느 걸 먼저 보는 게 좋을까요?
A. 개인적으로는 영화를 먼저 보시길 권합니다. 소설은 오토마쓰의 내면 독백과 회상을 압축적으로 담아 문학적인 맛이 강한 반면, 영화는 주변 인물들을 더 풍성하게 살려내 인물이 훨씬 입체적으로 느껴집니다. 영화로 먼저 감정선을 잡은 뒤 소설을 읽으면 장면 하나하나가 다르게 읽히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Q. 타카쿠라 켄이 이 영화에서 왜 그렇게 말이 없나요?
A. 그게 오토마쓰라는 캐릭터의 본질입니다. 오토마쓰는 감정을 언어로 표현하는 법을 배운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철도원으로 살아오는 동안 몸에 밴 과묵함이고, 가족에게조차 말하지 못한 미안함이 그 침묵 안에 다 쌓여 있습니다. 타카쿠라 켄은 대사 대신 눈빛과 뒷모습으로 그 감정을 전달하는데, 제 생각에 이런 연기가 오히려 더 오래 남습니다.
결론
「철도원」은 직업정신을 찬양하는 영화가 아니었습니다. 적어도 지금 저에게는 그렇습니다. 시대가 한 인간에게 무엇을 요구했고, 그 요구를 끝까지 받아들인 사람의 인생이 어떤 방식으로 끝나는지를 담담하게 보여주는 영화입니다. 오토마쓰는 철도를 지킨 사람이면서, 동시에 철도에 갇혀버린 사람입니다. 그 아이러니가 눈 내리는 호로마이역 풍경만큼 쓸쓸하게 남습니다.
처음에는 감동 영화로 봤고, 지금은 시대극으로 보입니다. 아마 10년 뒤에 또 보면 또 다르게 보일 것 같습니다. 그게 이 영화가 오래된 지금도 재개봉되고 사랑받는 이유가 아닐까 싶습니다. 아직 안 보셨다면, 한 번쯤 보시길 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