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목차
솔직히 저는 이 영화를 한참 늦게 봤습니다. 부모님 세대 영화라는 선입견 때문이었는데, 막상 보고 나서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습니다. 1996년작 홍콩영화 첨밀밀은 달콤하다는 뜻의 제목과 달리, 씁쓸하고 긴 여운을 남기는 작품입니다. 장만옥과 여명이라는 두 배우의 10년간의 엇갈림을 따라가다 보면, 이것이 단순한 멜로가 아니라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첨밀밀이라는 제목이 담고 있는 것
첨밀밀(甜蜜蜜)은 한자 그대로 풀면 '달콤하고 달콤하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蜜은 꿀을 뜻하는 글자로, 꿀처럼 달콤한 상태를 두 번 겹쳐 강조한 형용사입니다. 제목만 보면 설탕 범벅 로맨스가 떠오르는데, 실제로 영화를 보고 나면 그 달콤함이 어디서 오는지, 동시에 왜 그렇게 씁쓸한지를 몸으로 이해하게 됩니다.
영어 부제는 'Comrades: Almost A Love Story'입니다. 여기서 Comrades, 즉 동지라는 단어가 핵심입니다. 동지란 원래 같은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인데, 이 영화에서는 홍콩이라는 낯선 땅에서 생존을 위해 분투하는 두 대륙 출신 청년을 그렇게 부릅니다. '거의 러브스토리에 가까운'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것도 의미심장합니다. 사랑인 듯, 사랑 아닌, 사랑 같은 관계를 영어 부제가 이미 정직하게 예고하고 있는 셈입니다.
영화 제목과 동명의 OST는 대만 출신 가수 등려군(鄧麗君)이 1979년 발표한 노래입니다. 등려군은 아시아 전역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누린 가수로, 특히 중화권에서는 시대를 초월한 아이콘으로 불립니다. 원곡은 인도네시아 민요를 개사한 것으로, 등려군 특유의 달콤하면서도 어딘가 쓸쓸한 음색이 멜로디와 맞물려 듣는 사람을 무장해제시킵니다. 제가 처음 이 노래를 들었을 때, 가사 한 마디도 알아듣지 못하면서 왜인지 코끝이 찡했던 기억이 납니다. 영화가 개봉한 1997년, 이 곡은 한국에서도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고, 지금까지도 중국 노래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곡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줄거리 — 홍콩에서 시작된 엇갈림
1986년, 중국 톈진 출신의 청년 소군(여명 분)은 약혼녀 소정과의 결혼 자금을 마련하겠다는 단순한 목표 하나를 들고 홍콩으로 건너옵니다. 광둥어도 영어도 서툰 채로 혈혈단신 뛰어든 이 도시에서 소군이 처음 맞닥뜨린 곳은 맥도날드입니다. 주문조차 제대로 못 해 쩔쩔매는 소군에게 유창한 보통어로 응대해 준 사람이 바로 아르바이트생 이요(장만옥 분)입니다. 제가 이 장면에서 느낀 것은 낯섦이 아니라 반가움이었습니다. 언어가 통하는 사람을 만났을 때의 그 안도감이 화면을 통해 그대로 전해졌거든요.
이요는 광둥성 출신의 억척스럽고 현실적인 여성입니다. 돈을 벌기 위해서라면 소군에게 영어 학원을 소개해 주면서 소개비를 챙기는 것도 서슴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순수한 이해관계로 시작된 관계였지만, 홍콩이라는 타향에서 서로가 서로의 유일한 말동무이자 위안이 되면서 두 사람의 거리는 조금씩 좁혀집니다. 대만 가수 등려군의 카세트테이프를 거리에서 팔던 장면, 이요의 차를 같이 타고 노래를 따라 부르던 장면들이 그 과정을 담담하게 보여줍니다.
하지만 소군에게는 고향에서 기다리는 약혼녀 소정이 있습니다. 이요는 오직 성공을 향해 달려야 하는 현실이 있습니다. 두 사람은 사랑한다고 말하지 못하면서도 선을 넘고, 그 후에도 각자의 사정 속에서 만나고 헤어지기를 반복합니다. 홍콩이 두 사람에게 안정적인 삶을 허락하지 않자 결국 각자의 길로 흩어지고, 그 여정은 뉴욕까지 이어집니다.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두 사람을 잇는 유일한 연결고리는 등려군의 노래 첨밀밀 하나뿐입니다.
- 소군(여명 분): 중국 톈진 출신, 약혼녀와의 결혼 자금 마련을 위해 홍콩으로 온 순박한 청년
- 이요(장만옥 분): 광둥성 출신, 현실적이고 억척스러운 여성으로 홍콩 생활에 더 능숙함
- 소정(양공여 분): 소군의 약혼녀로 두 사람 사이에 내내 존재하는 현실의 벽
- 구양(증지위 분): 이요가 기대는 사채업자로, 두 사람의 감정을 읽어내는 인물
결말 — 뉴욕에서 완성된 달콤함
영화의 결말은 뉴욕입니다. 홍콩에서, 다시 각자의 땅으로 흩어졌던 두 사람이 이역만리 뉴욕의 거리에서 극적으로 재회합니다. 재회의 계기는 놀랍게도 등려군의 부고(訃告) 소식입니다. 여기서 부고란 사람이 사망했음을 알리는 공식 소식을 말합니다. 1995년 실제로 세상을 떠난 등려군의 사망 소식이 거리의 TV 화면에 흘러나오고, 그 노랫소리를 따라 두 사람은 같은 자리에서 서로를 발견합니다. 노래 하나가 10년 넘는 엇갈림의 매듭을 푸는 순간입니다.
이 결말은 솔직히 예상 밖이었습니다. 극적인 재회이긴 하지만, 그 계기가 사랑하는 가수의 죽음이라는 점이 묘하게 슬프면서도 아름다웠습니다. 달콤함이 완성되는 순간에 동시에 무언가를 잃는 감정이 겹치는 구조, 이것이 이 영화가 단순한 멜로드라마가 아닌 이유입니다.
영화를 더 깊이 있게 보는 시선도 있습니다. 소군은 중국 본토를, 이요는 홍콩을 상징하는 알레고리(allegory)적 인물로 해석하는 관점입니다. 알레고리란 인물이나 사건을 통해 다른 의미를 전달하는 문학적 기법을 말합니다. 1997년 홍콩 반환을 배경으로, 끊임없이 엇갈리면서도 결국 하나로 만나는 두 인물의 여정이 중국과 홍콩의 역사적 흐름과 겹쳐 보인다는 것입니다. 감독 진가신(천커신) 스스로는 이 영화의 핵심은 결국 개인이고 사람이라고 강조합니다(출처: 홍콩영화발전국). 거대한 역사 앞에서도 사랑하고 엇갈리고 기다리는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점이 시대를 건너 공감을 얻는 이유라는 것입니다. 저는 이 두 시선 모두 맞다고 봅니다. 어느 쪽으로 봐도 이 영화는 충분히 매력있습니다.
홍콩 뉴웨이브와 지금도 좋은 이유
감독 진가신은 홍콩 뉴웨이브(Hong Kong New Wave)를 대표하는 작가주의 감독입니다. 홍콩 뉴웨이브란 1970년대 말부터 1990년대까지 홍콩에서 일어난 영화 운동으로, 사회 현실을 날카롭게 포착하면서도 개인의 감정을 섬세하게 그려내는 것이 특징입니다. 첨밀밀은 그 흐름 위에 있는 영화입니다. 자극적인 편집도, 화려한 CG도 없지만 그래서 오히려 더 오래 남습니다.
이 영화는 1996년 홍콩 개봉 당시 홍콩영화상(Hong Kong Film Awards)에서 작품상, 감독상, 여우주연상, 남우조연상, 각본상 등 9개 부문을 수상했습니다. 홍콩영화상은 홍콩 영화계의 권위 있는 시상식으로, 아시아권에서 그 공신력을 인정받는 자리입니다(출처: 홍콩영화상 공식 사이트). 9개 부문 석권이라는 수치는 단순한 흥행 성공이 아니라 작품성 면에서도 당대 최고 수준이었음을 방증합니다.
이 영화는 좀 다릅니다. 요즘 멜로 영화들이 감정을 직접 설명하려 드는 것과 달리, 첨밀밀은 보여줄 뿐입니다. 외투 단추를 잠가주는 손짓 하나, 함께 부르는 노래 한 소절에서 설명 없이 감정이 전달됩니다. 이것이 미장센(mise-en-scène)의 힘입니다. 미장센이란 화면 안에 배치된 모든 시각 요소들, 즉 배우의 위치, 조명, 소품, 구도 등을 통해 감정과 의미를 전달하는 영화적 기법을 말합니다. 진가신은 이 기법을 통해 대사 한 마디 없이도 두 사람의 감정 변화를 정확하게 전달합니다. 상영 시간 116분 동안 단 한 장면도 허투루 쓰인 것이 없다고 느꼈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첨밀밀 OST 원곡은 누가 부른 건가요?
A. 영화 제목과 동명의 OST 첨밀밀은 대만 출신 가수 등려군(鄧麗君)이 1979년 발표한 노래입니다. 원곡은 인도네시아 민요를 개사한 것으로, 등려군은 1995년 세상을 떠났으며 영화 결말에서 그녀의 부고 소식이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함께 유명한 곡인 월량대표아적심(月亮代表我的心) 역시 같은 가수의 곡입니다.
Q. 첨밀밀 관람 등급과 상영 시간은 어떻게 되나요?
A. 관람 등급은 15세 이상 관람가이며 상영 시간은 116분입니다. 1996년 홍콩에서 먼저 개봉했고 국내에는 1997년 극장 개봉했습니다. 2026년 재개봉 당시에는 롯데시네마 단독 상영으로 진행됐습니다.
Q. 소군이 중국 본토, 이요가 홍콩을 상징한다는 해석이 맞나요?
A. 그런 알레고리적 해석이 존재하는 것은 맞습니다. 1997년 홍콩 반환을 앞두고 제작된 영화인 만큼, 두 사람의 엇갈림이 중국과 홍콩의 역사적 관계와 겹쳐 보인다는 시각입니다. 다만 감독 진가신 스스로는 이 영화의 핵심은 역사보다 개인이라고 강조했습니다. 두 시선 모두 타당하므로 어느 관점으로 보더라도 영화를 즐기는 데 무리가 없습니다.
Q. 첨밀밀이 홍콩영화상에서 몇 개 부문을 수상했나요?
A. 1996년 홍콩영화상에서 작품상, 감독상, 여우주연상, 남우조연상, 각본상 등 9개 부문을 수상했습니다. 장만옥은 이 작품으로 여우주연상을 받았으며, 당시 홍콩 영화계에서 이 영화의 작품성이 얼마나 높이 평가받았는지를 보여주는 수치입니다.
결론
첨밀밀은 달콤한 제목과 달리 끝내 씁쓸한 영화입니다. 하지만 그 씁쓸함이 싫지 않습니다. 사랑한다고 말하지 못하면서도 10년을 이어가는 두 사람의 이야기는, 거창한 사랑 고백보다 훨씬 더 현실적이고 그래서 더 깊이 가슴에 남습니다. 영화를 보고 나서 확실히 느낀 것은, 부모님 세대만의 영화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첫사랑, 잊지 못하는 사랑, 이루지 못한 사랑의 기억이 남아 있다면 이 영화는 그 감정들이 떠오를 것입니다. 116분이 아깝지 않습니다. 등려군의 노래가 흘러나오는 동안, 한 번쯤 자신의 첨밀밀을 떠올려 보시길 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