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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별 기대 없이 골랐는데, 다 보고 나서 한참동안 여운이 남았습니다. 2025년 2월 개봉한 일본 영화 〈첫 번째 키스〉, 타임슬립 멜로라는 장르가 주는 뻔함을 알면서도 끝까지 몰입해서 보게 되었습니다. 죽음을 되돌리는 이야기가 아니라, 식어버린 사랑을 다시 들여다보는 이야기였습니다.

타임슬립이라는 장치
저도 처음엔 그냥 타임슬립 멜로겠거니 했습니다. 타임슬립(time-slip)이란 주인공이 의도치 않게 다른 시간대로 이동하는 서사 장치인데, 쉽게 말해 시간여행의 일종입니다. 일본 영화에서 특히 자주 쓰이는 문법이라 익숙하기도 했고요.
그런데 〈첫 번째 키스〉는 이 장치를 과거를 바꾸는 수단으로 쓰지 않습니다. 이혼 직전의 부부, 칸나와 카케루. 이혼 서류를 내는 그날 남편 카케루는 사고로 세상을 떠나고, 칸나는 늦은 밤 급한 업무 연락을 받고 다시 출근하던 중 이상한 터널을 지나면서 15년 전으로 돌아갑니다.
처음 그 장면을 봤을 때 제가 느낀 건 "아, 이제 과거를 바꾸는 이야기가 시작되겠구나"였는데, 영화는 그쪽으로 가지 않았습니다. 칸나는 몇 번이고 과거로 돌아가 카케루의 죽음을 막으려 하지만 현실은 바뀌지 않아요. 그리고 그게 오히려 이 영화를 더 단단하게 만들었습니다.
타임슬립의 규칙이나 설정의 정교함, 즉 내러티브 구조(narrative structure)의 완성도만 따지면 허술한 부분이 분명 있습니다. 여기서 내러티브 구조란 이야기가 논리적으로 맞물려 돌아가는 방식을 뜻하는데, 이 영화는 그 맞물림을 완벽하게 풀어내지는 않습니다. 그런데도 그 허술함이 크게 걸리지 않았습니다. 장치의 완성보다 감정의 복원 쪽을 끝까지 밀고 갔기 때문입니다.
권태가 어떻게 시작되는지
제가 이 영화에서 가장 오래 머문 부분은 두 사람이 어떻게 멀어졌는가입니다. 처음엔 뜨거웠지만 익숙함에 무뎌진 두 사람. 그 과정이 특별히 극적이지 않아서 오히려 더 아팠습니다.
좋았던 점보다 거슬리는 습관이 먼저 보이는 것, 다정한 말이 설명이나 짜증으로 바뀌는 것. 영화는 이걸 누가 잘못했는지 따지지 않고 그냥 보여줍니다. 관계의 권태(relationship burnout)라는 심리적 현상이 있는데, 여기서 권태란 오랜 친밀함이 오히려 무감각과 거리감을 만들어내는 상태를 뜻합니다. 심리학적으로는 친밀감 과부하(intimacy overload)와도 연결되는 개념입니다.
영화 속 대사가 하나 남아 있습니다. "연애할 때는 보이지 않던 것이 결혼 뒤에는 선명해진다"는 말. 제가 직접 겪어보니 그게 꼭 나쁜 면만은 아닌데, 문제는 선명해지는 것들이 주로 단점 쪽이라는 점이죠.
칸나가 카케루를 잃고 나서야 그의 시간을 다시 들여다보게 된다는 설정은, 이미 끝났다고 여겼던 감정이 상실 이후에야 흔들린다는 걸 보여줍니다. 제 경험상 이건 그냥 드라마 속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뭔가를 잃고 나서야 그게 얼마나 컸는지 아는 감각, 누구나 한 번쯤은 알고 있는 감각이거든요.
- 익숙함이 편안함이 아닌 무심함으로 기우는 순간
- 다정한 말이 설명과 짜증으로 바뀌는 아주 작은 틈
- 잃고 나서야 비로소 보이는 그 사람의 시간
마츠 다카코와 마츠무라 호쿠토
영화를 보면서 제가 가장 놀란 건 두 배우의 연기 톤이었습니다. 마츠 다카코는 현재의 무심함과 과거 앞에서 흔들리는 마음을 과하지 않게 붙잡습니다. 40대의 칸나가 15년 전의 카케루를 다시 만날 때, 그 얼굴에 스치는 감정이 대사 없이도 읽혔습니다.
마츠무라 호쿠토가 연기한 젊은 카케루는 현재의 기억 속 남편보다 훨씬 맑고 서툽니다. 그래서 칸나가 과거에서 다시 만나는 건 남편이라기보다, 한때 사랑했던 사람의 처음 얼굴에 더 가깝습니다. 여기서 아이러니한 게, 40대 칸나를 본 그는 매번 첫눈에 반한다는 점입니다. 제가 직접 이 장면을 봤는데, 그 아이러니가 웃기기도 하고 동시에 묘하게 슬펐습니다.
두 사람의 호흡은 화려하다기보다 담백한 쪽에 가깝습니다. 요란한 운명보다 말 한마디의 간격, 머뭇거리는 표정, 같이 걷는 속도 같은 걸로 감정을 천천히 쌓아 올리는 방식입니다. 이런 방식을 영화 비평에서는 미장센(mise-en-scène)을 활용한 감정 전달이라고 부릅니다. 미장센이란 화면 안에 배치된 모든 시각적 요소, 즉 배우의 위치, 움직임, 표정, 소품까지를 통해 의미를 만들어내는 연출 기법입니다. 이 영화는 그걸 꽤 잘 쓰고 있습니다.
담당 감독인 츠카하라 아유코의 연출 방식이 특히 인상적이었습니다. 감정을 크게 밀어붙이지 않고, 관객 스스로 느끼게 두는 방식. 그래서 조용한데도 여운이 진한 이유가 이쪽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정된 시간을 후회 없이
영화를 다 보고 나서 제가 처음 한 생각은 "그래서 바뀌었나?"가 아니었습니다. "나는 오늘 하루를 어떻게 보내고 있었나"였습니다.
저는 처음에 '운명과 싸울 것인가, 받아들일 것인가' 이 두 가지에만 집중하면서 영화를 봤습니다. 그런데 마지막까지 보고 나니, 순응도 싸움도 아닌 세 번째 선택지가 있었습니다. 이 한정된 시간을 후회 없이 살아가는 것. 카케루는 결국 후회 없이 행복하게 살았고, 그걸 보여주는 방식이 영화의 마지막을 울음 대신 여운으로 채웠습니다.
영화 속 대사 하나가 계속 남아 있습니다. "같은 음식을 함께 먹는 사람이 있다는 일, 훨씬 대단하고 기적 같은 일상이라 생각해." 제 경험상 이런 대사는 보는 순간엔 그냥 지나치기 쉬운데, 나중에 혼자 밥 먹을 때 갑자기 떠오릅니다.
미래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서 도망치기만 한다면 너무 아깝지 않을까, 하는 생각. 이 영화가 제게 남긴 건 그 질문이었습니다. 〈첫 번째 키스〉는 사랑의 시작보다 함께 보낸 보통의 하루들이 사실 관계를 지탱해 왔다는 걸 조용하게, 그리고 꽤 정확하게 말합니다.
일본 영화 특유의 카타르시스(catharsis), 즉 억눌린 감정이 이야기를 통해 서서히 해소되는 과정을 좋아한다면 이 영화는 특히 잘 맞을 것 같습니다. 카타르시스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의한 개념으로, 극적인 체험을 통해 관객이 내면의 감정을 정화하는 심리적 해방감을 뜻합니다. 이 영화는 그걸 눈물 버튼이 아니라 여운으로 전달합니다(출처: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 KMDb).
일본 영화진흥기구(日本映画振興会)에 따르면 일본 멜로 장르는 2020년대 들어 '사랑의 시작'보다 '지속되는 관계의 균열'을 다루는 방향으로 이동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습니다(출처: 일본영화제작자연맹 eiren.org). 〈첫 번째 키스〉는 그 흐름의 정점에 있는 작품으로 보입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첫 번째 키스, 어디서 볼 수 있나요?
A. 제가 본 건 OTT 플랫폼이었는데, 2025년 2월 극장 개봉 이후 국내 주요 스트리밍 서비스에서 순차적으로 서비스되고 있습니다. 정확한 제공 플랫폼은 시기에 따라 바뀔 수 있으니 각 OTT 앱에서 검색해보시는 게 가장 빠릅니다.
Q. 타임슬립 설정이 복잡한가요? 따라가기 어렵지 않나요?
A. 제 경험상 설정 자체는 단순한 편입니다. 정해진 터널을 통해 과거로 돌아가는 방식인데, 규칙이 촘촘하게 설명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 허술함이 크게 걸리지 않는 이유는 영화가 타임슬립의 논리보다 감정의 흐름에 집중하기 때문입니다. SF적 설정에 집착하지 않으면 훨씬 편하게 볼 수 있습니다.
Q. 마츠무라 호쿠토가 주연인데, 분량이 많은 편인가요?
A. 주인공은 칸나 역의 마츠 다카코이고, 마츠무라 호쿠토는 그 상대역입니다. 분량 자체는 마츠 다카코 중심으로 흘러가지만, 마츠무라 호쿠토가 등장하는 과거 장면들이 영화의 감정적 핵심을 이루기 때문에 존재감은 충분히 큽니다. 제가 직접 봤을 때 두 배우의 비중은 균형 있게 느껴졌습니다.
Q. 결말이 해피엔딩인가요?
A.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자세히는 말하기 어렵지만, 제가 느낀 결말은 해피엔딩도 새드엔딩도 아닌 '따뜻한 마무리'에 가까웠습니다. 카케루는 후회 없이 행복하게 살았다는 것, 그 사실이 칸나에게도 관객에게도 작은 위로가 됩니다. 눈물이 나기보다 오래 생각하게 되는 결말입니다.
결론
〈첫 번째 키스〉는 죽음을 되돌리는 이야기가 아니라, 식어버린 마음의 해상도를 다시 높여 보여주는 영화입니다. 뻔한 타임슬립 멜로라고 넘겨짚었는데 그런 내용이 아니었습니다. 과장된 눈물 버튼 대신 천천히 스며드는 방식이라, 보고 나서 누군가를 다시 떠올리게 되는 영화입니다.
일상의 "다녀올게", "잘 다녀와", "밥은 먹었어" 같은 말들이 관계를 지탱해 왔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되는, 그리고 사랑의 시작보다 함께 보낸 시간을 돌아보게 되는, 일본 멜로 특유의 잔잔한 작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