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카테고리 없음

태풍이 지나가고 (료타, 고레에다, 가족드라마)

lime22 2026. 7. 22. 11:20

목차


    문학상을 받은 지 15년이 지나도록 두 번째 소설을 쓰지 못한 남자. 꿈과 현실 사이 어딘가에서 발이 묶인 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료타. 가족의 회복을 원하지만 맘대로 되지않습니다. 이 영화는 삶이 그렇게 거창할 필요는 없다고 조용하고 차분하게 알려줍니다. 앞으로 나아가고 있으면 되는 것이라고요.

     

    태풍이 지나가고 (료타, 고레에다, 가족드라마)
    태풍이 지나가고 (료타, 고레에다, 가족드라마)

     

    료타라는 인물이 불편한 이유

    영화 <태풍이 지나가고>의 주인공 료타(아베 히로시)는 흔히 말하는 '공감형 주인공'과는 거리가 멉니다. 한때 신인 문학상을 받으며 주목받았지만 지금은 사설 흥신소에서 탐정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소설 취재를 위한 것"이라는 핑계를 스스로 하면서요. 저도 비슷한 자기 합리화를 많이 해왔던지라 보면서 웃음이 났습니다.

    더 문제는 흥신소에서 번 돈을 경마로 탕진하고, 전처 쿄코(마키 요코)에게 줄 양육비조차 없어서 홀로 사는 어머니 집에서 팔 만한 물건을 뒤지는 장면입니다. 이 장면은 보는 내내 민망하고 찌질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료타를 완전히 미워할 수가 없어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특유의 연출 방식 덕분인데, 그는 인물을 카메라로 심판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미쟝센(mise-en-scène)이라는 개념을 짚고 가면 좋습니다. 미쟝센이란 화면 안에 배치되는 모든 시각적 요소, 즉 인물의 위치, 조명, 소품, 배경을 통해 감독이 의미를 만들어내는 방식을 뜻합니다. 고레에다는 좁은 아파트 안에 네 식구를 담으면서 어떤 대사 없이도 관계의 긴장감과 온기를 동시에 전달합니다. 료타가 부끄럽게 느껴지는 것은 그가 나쁜 인간이라서가 아니라, 카메라가 그를 너무 가까이, 너무 솔직하게 담아내기 때문입니다.

    • 15년째 두 번째 소설을 쓰지 못한 전직 소설가
    • 사설 탐정 일을 하며 번 돈을 경마로 탕진
    • 양육비를 못 줄 만큼 만성적인 경제적 무능
    • 자기합리화로 현실을 외면하는 습관
    요약: 료타는 밉지않은 어딘가 익숙한 인물이며, 고레에다의 미쟝센은 그를 심판하지 않고 조용히 바라보게 만든다.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태풍을 쓰는 방식

    이 영화에서 태풍은 단순한 날씨가 아닙니다. 전처 쿄코와 아들 싱고가 료타의 어머니 집에 발이 묶이게 만드는 장치이기도 하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인물들을 한 공간에 가두어 서로의 진짜 모습을 드러나게 하는 극적 장치, 즉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의 변형된 형태입니다. 여기서 데우스 엑스 마키나란 이야기가 막혔을 때 외부의 힘이 개입해 상황을 풀어주는 서사 기법을 말하는데, 고레에다는 이것을 극적 해결이 아닌 감정적 노출의 용도로 씁니다. 태풍이 상황을 해결해 주는 게 아니라, 오히려 피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이죠.

    이 영화를 볼 때 카메라 위치에 집중해서 보는 것도 좋습니다. 고레에다는 인물을 클로즈업으로 몰아붙이지 않습니다. 조금 멀리서, 약간 여유 있는 거리에서 담습니다. 그래서 관객은 인물의 감정을 강요당하지 않고 스스로 느끼게 됩니다. 이 방식이 답답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오히려 그 여백이 호흡이 됩니다.

    특히 태풍이 절정에 달한 밤, 료타가 아들 싱고를 데리고 빗속 공원으로 나가 문어 모양 미끄럼틀 안에 있는 장면은 이 영화 전체를 통틀어 가장 인상적인 장면입니다. 좁고 우습게 생긴 공간이지만 그 안에서 세 사람이 잠깐 가족의 형태를 되찾습니다. 저는 이 장면이 짠하게 느껴졌습니다. 이 가족이 다시 합쳐지길 바라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죠.

    요약: 태풍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인물들의 감정을 압축하는 서사 장치이며, 고레에다의 카메라는 관객에게 감정을 강요하지 않는다.

     

    가족드라마 속 한탕주의가 말하는 것

    이 영화를 보다 보면 한탕주의 소재가 꽤 집요하게 반복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경마, 복권, 야구에서의 만루홈런. 료타와 그 주변 인물들은 한 방에 상황이 역전되기를 끊임없이 꿈꿉니다. 

    복권을 매주 사는 사람들에게 "그게 낭비 아니냐"라고 물으면 많은 이들이 이렇게 답합니다. "당첨을 바라는 게 아니라, 한 주를 버틸 희망을 사는 거라고." 제가 직접 들은 말입니다. 그 말이 이 영화의 모든 한탕주의 장면을 설명해 준다고 생각합니다. 료타가 복권을 긁는 것은 정말로 당첨될 거라고 믿어서가 아닙니다. 그 작은 가능성을 손에 쥐고 있어야 오늘을 살아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가능성 효과(possibility effect)라고 부릅니다. 가능성 효과란 실제 확률이 매우 낮더라도 사람들이 그 가능성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는 심리적 경향을 뜻합니다.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행동경제학자 다니엘 카너먼의 연구에서도 이 경향은 일관되게 나타납니다(출처: 노벨위원회). 고레에다는 이 심리를 비웃지 않습니다. 그것이 진창 같은 일상에서 사람이 살아남는 방식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장면에서 료타가 아들이 잃어버린 복권을 주머니에 챙기는 행동이 단순한 미련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그건 아들과 함께 나눈 시간의 증표이자, 여전히 오늘을 살아가겠다는 작은 신호입니다.

    요약: 영화 속 한탕주의는 어리석음의 표현이 아니라, 현실을 버티기 위해 인간이 품는 최소한의 가능성이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태풍이 지나간 자리에 남는 것

    다음 날 아침, 태풍은 깨끗하게 걷힙니다. 쿄코는 재결합을 원하는 료타에게 현실적인 말을 건네고, 각자의 길을 택합니다. 료타는 어머니가 챙겨준 짐을 들고 지하철역으로 향합니다. 뭔가 크게 달라진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이 결말이 비극으로 느껴지지 않습니다.

    이 영화의 원제인 '바다보다 더 깊게'는 극 중 등장하는 노래 가사에서 따온 것입니다. 어머니 요시코(키키 키린)가 료타에게 던지는 질문, "누군가를 바다보다 깊게 사랑해 본 적 있니?"는 사실 타인에 대한 사랑을 묻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의 삶을 온전히 받아들인 적 있느냐는 질문입니다. 

    료타가 아버지를 미워했던 이유가, 지금 아들 싱고가 료타를 바라보는 시선과 겹친다는 점은 이 영화의 가장 아픈 부분입니다. 카타르시스(catharsis), 즉 감정의 정화와 해소가 이 영화에서는 극적 사건이 아닌 조용한 인식의 변화를 통해 일어납니다. 료타는 성공한 소설가가 되지 못합니다. 전처와의 재결합도 못합니다. 하지만 그는 지하철 군중 속으로 걸어 들어가며 과거가 아닌 지금 이 자리에 발을 내딛습니다.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이것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오래 마음에 남는 결말이었습니다. 화려한 반전도, 감동적인 음악도 없는데 한참 동안 여운을 남깁니다. 사람이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사실 자체가, 오히려 위로가 되는 영화입니다.

    요약: 태풍 이후의 결말은 변화가 아닌 수용이며, 과거의 미련을 내려놓고 현재를 받아들이는 것이 이 영화가 말하는 진짜 성장이다.

     

    자주 묻는 질문

    Q. 태풍이 지나가고, 재미없는 영화 아닌가요?

    A. 빠른 전개나 자극적인 장면을 기대하신다면 다소 심심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인물들의 감정과 관계에 집중하다 보면 어느 순간 영화 속 시간에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처음 부분은 좀 지루할 수 있는데, 중반부터는 자연스럽게 녹아듭니다.

     

    Q.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다른 영화와 비교하면 어떤가요?

    A. <걸어도 걸어도>,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와 비슷한 결의 가족 드라마입니다. 모자 관계와 부자 관계를 겹쳐 그려내는 방식이 특히 <걸어도 걸어도>와 연결됩니다. 고레에다 감독의 첫 작품을 고르신다면 <태풍이 지나가고>도 충분히 좋은 입문작이 됩니다.

     

    Q. 키키 키린이 이 영화에서 얼마나 중요한가요?

    A. 영화 전체의 온도를 결정짓는 인물입니다. 따뜻하면서도 쿨하게 현실을 짚어주는 어머니 요시코 역할을 키키 키린이 맡아서, 무거워질 수 있는 분위기를 절묘하게 조율합니다. 개인적으로 키키 키린의 대사 한 줄 한 줄이 이 영화에서 제일 오래 기억에 남았습니다.

     

    Q. 영화 마지막 복권 장면이 무슨 의미인가요?

    A. 료타가 아들 싱고가 잃어버린 복권을 주머니에 챙기는 장면입니다. 일확천금을 노리는 것이 아니라, 아들과 함께 밤을 보낸 증표이기도 합니다. 거창한 기적이 아닌, 오늘을 살아가기 위한 작은 희망을 손에 쥔 채 앞으로 걸어가는 료타의 모습으로 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결론

    <태풍이 지나가고>는 완벽하지 않은 어른들을 위한 영화입니다. 목표를 이루지 못한 채 좌절하고 있는 분들께, 이 영화는 "그래도 괜찮다"라는 말을 들려줍니다. 자칫 어둡거나 우울할 수도 있는 내용을 조용하면서도 차분하게 보여주는 영화입니다.

    살면서 마주하는 수많은 무너짐이 있지만, 태풍이 지나간 다음 날 아침처럼 맑개 갠 하늘이 인물들을 비추 듯, 이들은 앞으로 나아간다는 작은 희망을 남깁니다. 거창한 위로나 해답은 필요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