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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극장에서 상영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만 해도 "1985년 일본 영화를 왜 지금?"이라는 의문부터 들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자리에 앉아 두 시간을 보내고 나서, 저는 한동안 좌석에서 일어나질 못했습니다. 소마이 신지 감독의 <태풍 클럽>은 태풍이 몰아치는 주말, 학교에 고립된 중학생들의 하룻밤을 그리는 영화입니다. 그런데 이 영화가 진짜 말하고 싶은 건 비바람이 아닙니다. 바람도 왜곡을 풀지 못하고, 폭우도 결핍을 채우진 못한다는 것—태풍 끝에 남은 것이 무엇인지를, 영화는 끝까지 관객에게 되묻습니다.

작가주의 연출이 포착한 청춘의 실제 얼굴
저는 영화를 보고, 처음 10분간은 당황스러웠습니다. 수영장에서 남학우를 로프로 묶어 물에 담갔다 꺼냈다 반복하는 아이들, 교복 차림으로 아무렇지 않게 담배를 피우는 중학생들. 유쾌한 일탈을 그릴 것이라고 반쯤 기대하며 앉았는데, 영화는 처음부터 그 기대를 비틀어 버렸습니다.
소마이 신지 감독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롱테이크(long take) 기법입니다. 여기서 롱테이크란 편집 없이 카메라를 장시간 돌려 한 장면을 연속으로 담아내는 촬영 방식을 의미합니다. 보통 감독들이 컷을 나눠 감정을 조율할 때, 소마이 신지는 그냥 카메라를 켜두고 기다립니다. 덕분에 배우들의 어색함과 충동, 산만함이 그대로 화면에 새겨집니다. 이게 연출인지 날것인지 구분이 안 갈 정도입니다.
<태풍 클럽>에 등장하는 아이들은 저마다 다른 결핍을 품고 있습니다. 리에는 이성과 모성(母性) 모두에서 사랑을 잃은 상태이고, 켄은 사랑의 표현 방식 자체가 뒤틀려 있으며, 미카미는 삶의 의미를 찾다 삶 자체를 의심하기 시작합니다. 아키라만이 태풍이 찾아오지 않은 채 주말을 집에서 보내고 월요일에 아무렇지 않게 등교합니다. 감독은 아키라라는 캐릭터를 통해 이 태풍이 물리적 현상이 아니라 내면의 상징임을 못 박습니다.
제가 이 영화를 두 번 본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첫 번째 관람에서는 그냥 충격으로 멍했습니다. 두 번째에야 비로소 각 인물의 결핍이 어떻게 다른 방향으로 폭발하는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영화 연구자들 사이에서도 소마이 신지의 작가주의(auteurism)—즉 감독 개인의 세계관과 스타일이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창작 방식—는 일본 뉴웨이브 계보에서 독보적인 위치로 평가됩니다(출처: 키네마 순보).
영화 내내 그 누구도 비바람 때문에 다치지 않습니다. 태풍이 잠시 멎자 아이들은 오히려 밖으로 나와 춤을 춥니다. 비가 다시 내리니까 교복을 벗고 빗속에 섞여 듭니다. 물리적 태풍은 아이들의 내면을 잠시 바깥으로 꺼내놓은 장치일 뿐이었습니다. 이런 방식의 영화는 한 번 보는 것만으로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 리에: 이성과 모성 양쪽에서 사랑이 끊긴 상태. 충동적 가출로 결핍을 채우러 움직이는 유일하게 능동적인 인물
- 미카미: 야구라는 삶의 축을 잃은 후 종(種)과 개(個)의 철학적 질문에 빠져들다 극단적 선택에 이름
- 켄: 사랑을 받아본 적 없어 표현 방식 자체가 폭력으로 귀결되는 인물. 가장 불쾌하고 가장 납득하기 어려웠습니다
- 아키라: 내면에 태풍이 찾아오지 않은 유일한 인물. 태풍의 상징성을 역설적으로 확인시켜 줌
청춘의 고뇌에 내린 두 가지 다른 대답
영화를 보고 나서 한동안 머릿속을 떠나지 않은 장면이 있습니다. 오카리나를 부는 어른 두 명입니다. 새벽 비바람 속에서, 학교 아이들이 불렀던 것과 같은 노래를 연주하고 있습니다. 리에가 말을 걸자 그들은 "오카리나는 아침에 부는 것"이라며 돌아섭니다. 제가 이 장면을 보면서 찔렸던 이유는, 그 두 사람이 딱 저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사춘기의 질문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채 어른의 몸으로 살아가는 사람.
영화의 핵심 축은 미카미와 리에라는 대조적인 두 인물이 맡습니다. 둘 다 같은 질문 앞에 섰습니다. 종(種)의 섭리—즉 모든 개인이 결국 평범한 어른으로 귀결되는 불가역적 흐름—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이 개념은 영화 속 명문대생 형과의 대화에서 "달걀이 닭이 되기 전에 날 수 있도록 변할 수 있을까"라는 물음으로 제시됩니다.
미카미는 그 질문에 죽음으로 답합니다. 종에 종속되기 이전의 자신을 지키겠다는, 가장 순결해 보이는 저항이었겠지요. 그런데 영화는 진흙 속에 V자로 처박힌 미카미의 시체를 우스꽝스럽게 연출합니다. 저는 이 장면에서 감독이 미카미의 선택을 비극으로 애도하지 않는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가장 능동적인 저항처럼 보였지만, 동시에 자신의 모든 가능성을 스스로 지워버리는 행위이기도 했으니까요.
리에의 대답은 다릅니다. 제 생각에 이런 캐릭터의 성장을 설득력 있게 그리는 영화가 드물다고 느끼는데, <태풍 클럽>의 리에는 그 드문 경우에 해당합니다. 태풍 속에 뛰쳐나간 리에는 수상한 대학생의 집에서 몸을 피하다 교복을 다시 입고 빗속으로 나옵니다. 정체성을 상징하는 교복을 스스로 입고 비바람을 정면으로 뚫는 인물은 작중에서 리에 하나뿐입니다. 나머지 아이들은 비가 거세지자 교복을 벗었습니다.
일본 영화 비평 아카이브에서도 <태풍 클럽>을 두고 청소년 정서의 이중성—혼돈과 성장이 동시에 일어나는 시기—을 가장 정직하게 포착한 작품 중 하나로 평가합니다(출처: 영화비평(映画秘宝)). 이 영화를 사춘기 시절에 봤다면 리에의 결말에서 희망을 읽기보다 충격에 멍했을 것 같습니다. 첫 번째 관람에서 실제로 그랬고요. 어른이 되어 본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드는 몇 안 되는 영화입니다.
태풍의 주말이 지나고, 리에와 아키라가 등굣길에 나란히 걷습니다. 아키라가 키가 큰 것 같다는 리에의 말 한마디. 평소 따분하던 학교가 금각사처럼 예뻐 보인다는 감상. 이 짧은 대사들이 성장의 증거로 자연스럽게 읽힙니다. 소마이 신지 감독은 성장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냥 보여줄 뿐입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태풍 클럽은 어디서 볼 수 있나요?
A. 2024년 한국 극장 개봉을 통해 정식 소개되었습니다. 극장 상영 종료 후에는 VOD 혹은 스트리밍 서비스 입점 여부를 개별 플랫폼에서 확인하시는 것이 가장 정확합니다. 현재는 쿠팡플레이에서 개별구매 가능합니다.
Q. 태풍 클럽이 한국에 이제야 개봉한 이유가 있나요?
A. 한국에서는 1998년까지 일본 대중문화 수입이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1985년 개봉작인 <태풍 클럽>이 약 40년이 지나서야 한국 극장에 걸린 데는 그 역사적 배경이 크게 작용합니다. 거기에 영화 내용 자체도 당대 한국 정서에서 받아들이기 어려운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Q. 소마이 신지 감독의 다른 작품도 비슷한 스타일인가요?
A. 소마이 신지 감독은 롱테이크와 즉흥적인 현장 연출을 일관되게 유지한 작가주의 감독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태풍 클럽> 외에도 <이사>(引越し) 등이 비슷한 결의 청춘 서사를 다루고 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제가 <태풍 클럽>을 두 번 보고 나서 다른 작품까지 찾아보게 된 건, 그만큼 이 감독의 스타일이 강하게 남아서입니다.
Q. 미카미의 죽음은 영화에서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요?
A. 영화는 미카미의 선택을 영웅적으로 애도하지 않습니다. 진흙 속에 우스꽝스럽게 처박힌 시체의 연출이 그 증거입니다. 종의 섭리에 저항하는 가장 능동적인 방식처럼 보이지만, 동시에 자신의 모든 가능성과 의미를 스스로 지워버리는 무용한 행위이기도 하다는 것이 제 해석입니다. 감독은 답을 주지 않고, 다만 그 장면을 그렇게 찍었습니다.
결론
<태풍 클럽>의 모든 장면을 편안하게 긍정할 수는 없었습니다. 실제 미성년 배우들의 신체를 노출하는 방식, 켄이라는 인물이 저지르는 행위의 수위는 지금 기준으로 보면 명확하게 불쾌하고, 그 점은 솔직하게 말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특정 시대와 환경이 아니었다면 존재하지 못했을 표현들입니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가진 힘에 압도되지 않기는 어렵습니다. 청춘을 빛나는 시절로 미화하는 수많은 영화들과 달리, <태풍 클럽>은 그 시기가 얼마나 불완전하고 불안했는지를 롱테이크라는 방식으로 정직하게 포착합니다. 제가 사춘기를 겪던 15년 전쯤이 아니라 지금 이 나이에 봐서 다행이라고 느끼는 이유도 거기 있습니다. 앞으로도 꽤 오랫동안 무겁게 남아 있을 영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