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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사람과 하루를 온전히 시간을 보낸다는 게 낭만일까요, 아니면 그냥 시간 낭비일까요. 저는 이 영화를 보면서 꽤 오래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일본 영화 "흐르는대로"는 어떤 사건도, 극적인 반전도 없이 그냥 두 사람이 걷고 말하고 또 걷는 하루를 따라갑니다. 그런데 다 보고 나서 이상하게 뭔가 남더라고요.

끌림
영화는 버스 안에서 시작합니다. 주인공 사토미(카라타 에리카)가 옆자리 낯선 남자 토모노리(엔도 유야)의 책을 슬쩍 훔쳐보는 장면인데요. 제가 본 첫인상은 "아 맞아, 저 상황 나도 해봤다"였습니다. 요즘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종이책 읽는 사람 보면 괜히 눈이 가잖아요. 딱 그 감각으로 영화가 시작됩니다.
토모노리가 버스에서 내리면서 책갈피를 떨어뜨리고, 사토미는 그걸 줍습니다. 이 장면이 영화 전체의 복선이자 내러티브 장치(narrative device), 그러니까 이야기를 앞으로 끌고 나가는 소품 역할을 합니다. 여기서 내러티브 장치란 영화나 소설에서 인물 간의 관계나 사건을 자연스럽게 연결해 주는 매개 요소를 말합니다. 책갈피 하나가 두 사람을 세 번이나 엮어주거든요.
사토미는 언니 가게를 대신 봐주기로 했는데, 속으로는 손님이 들어오지 않길 바라면서 CLOSED 팻말을 걸어둔 채 앉아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버스에서 봤던 그 남자가 공원에 있는 걸 발견하자 적극적으로 말을 겁니다. 저는 이 부분이 꽤 설득력 있게 다가왔습니다. 일반적인 로맨스 영화처럼 '첫눈에 반했다'는 식이 아니라, 책과 책갈피라는 연결 고리를 사전에 만들어뒀기 때문입니다.
둘은 이야기를 나누다가 함께 걷기 시작합니다. 택시를 타고 토모노리가 소개하는 장소로 이동하고, 거기서 또 걷고, 앉고, 멈추고를 반복합니다. 대화는 딱히 영양가 있다고 하기 어렵습니다. 사토미는 반박하고 조롱하고, 토모노리는 이상하리만치 빡치지 않고 받아줍니다. 제가 저 상황이었으면 솔직히 두 번째 골목쯤에서 포기했을 것 같습니다.
- 책갈피: 두 사람을 세 번 이어주는 핵심 내러티브 장치
- 사토미의 이중성: 손님은 내치면서 이 남자에게만 먼저 말을 건다
- 대화의 진실성 문제: 사토미가 나중에 스스로 "거짓이었다"고 밝히는 순간들이 등장한다
- 공간의 흐름: 공원 → 택시 → 거리 → 다리로 이어지는 동선이 감정의 밀도를 높인다
영화 속에서 사토미가 문학을 무척 좋아하면서도 그 일을 직업으로 삼는 걸 두려워한다는 고백이 나옵니다. "너무 좋아하는 걸 하면 싫어질까봐 겁난다"는 말인데, 이건 캐릭터 심리를 보여주는 장치이기도 하지만 영화 전체의 태도를 암시하기도 합니다. 흐르는 대로 두는 것. 붙잡으면 망가질 것 같으니까요. 일본 영화 비평에서 자주 언급되는 모노노아와레(物の哀れ), 즉 '사물의 덧없음에서 오는 감수성'이 이 영화 전반에 깔려 있습니다. 모노노아와레란 헤이안 시대부터 내려온 일본 미학 개념으로, 아름다운 것이 사라지거나 지나가는 데서 느끼는 애잔한 감정을 뜻합니다(출처: Britannica).
하루의 감정과 결말
해 질 무렵, 둘은 다리 위에서 키스를 합니다. 이 장면이 영화에서 가장 감정이 고조되는 지점인데, 저는 오히려 이 부분에서 한 발짝 물러서게 됐습니다. 이게 진짜 감정인지 아니면 하루라는 시간이 만들어낸 착각인지, 영화가 끝까지 답을 주지 않거든요.
사토미는 책갈피를 돌려주겠다며 다시 가게로 돌아가자고 합니다. 그런데 정작 가게에 가보니 책갈피를 들고 나오는 사이, 토모노리의 전 여자친구가 나타납니다. 둘은 눈앞에서 사라지고, 사토미는 그 모습을 멀찌감치 바라봅니다. 그리고 자신을 기다리던 남자에게로 돌아갑니다. 영화는 거기서 끝입니다.
처음 이 결말을 봤을 때 솔직히 이건 뭐지 싶었습니다. 제 경험상 로맨스 영화 결말에서 이런 식으로 허탈한 감정을 주는 경우가 드물거든요. 근데 생각해 보면 이게 이 영화의 가장 솔직한 점입니다. 사토미와 토모노리 모두, 돌아갈 곳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영화 속 대화들은 서사적 불신뢰성(unreliable narration)을 적극적으로 활용합니다. 서사적 불신뢰성이란 이야기 안의 인물이 하는 말이나 행동이 사실인지 아닌지 관객이 판단할 수 없게 만드는 서술 기법을 뜻합니다. 사토미가 스스로 '거짓이었다'라고 밝히는 순간이 여러 번 나오고, 토모노리의 본심 역시 마지막까지 베일에 싸여 있습니다. 영화학계에서는 이런 기법이 관객의 능동적 해석을 유도한다고 분석합니다(출처: JSTOR 영화 서사 연구).
저는 이 영화를 보는 관객이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실제로 저 자리에 있었다면 시간도 아깝고 감정도 소모됐을 겁니다. 근데 화면 밖에서 바라보니까 이상하게 이해가 됩니다. 딱히 목적 없이 그 순간만큼은 진짜였던 감정들. 현실에서 못 하는 말을 모르는 사람에게 던져보는 그 감성. 사토미가 쓸쓸한 이기주의자처럼 보이면서도, 그 감정이 완전히 낯설지 않은 이유가 거기 있는 것 같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흘러가는 하루 결말이 왜 그렇게 끝나는 건가요?
A. 두 사람 모두 현실로 돌아갈 곳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토모노리는 전 여자친구를 만나고, 사토미는 자신을 기다리던 남자에게 돌아갑니다. 영화는 이 하루가 예외적인 시간이었음을 결말로 보여줍니다. 어느 쪽도 현실을 바꾸지 않은 채 흘러가버린 하루입니다.
Q. 카라타 에리카가 연기한 사토미는 나쁜 사람인가요?
A. 영화 안에서도 "현실을 못 보고 사람을 물건처럼 대하는 이기주의자"라는 표현이 직접 등장합니다. 그렇지만 그게 사토미를 단순히 나쁜 사람으로 만드는 건 아닙니다. 그 쓸쓸함 자체가 캐릭터의 핵심이고, 카라타 에리카가 그 미묘한 감정을 표정으로 잘 전달해줍니다.
Q. 이 영화 책갈피가 왜 그렇게 중요한가요?
A. 책갈피는 이 영화에서 내러티브 장치로 기능합니다. 버스에서 줍고, 가게에서 같은 걸 팔고 있다는 걸 알게 되고, 마지막에 돌려주려다 타이밍을 놓치는 구조입니다. 결국 끝까지 전달되지 못한 책갈피가 이 하루의 성격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Q. 로맨스 영화를 별로 안 좋아하는데 이 영화도 비슷한가요?
A. 전형적인 로맨스와는 결이 다릅니다. 설레는 전개보다는 건조하고 묘한 대화들이 이어지고, 감정보다 분위기가 앞서는 영화입니다. 오히려 로맨스 영화를 잘 안 보는 분이 더 담담하게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결론
제가 이 영화에서 오래 남은 장면은 키스 장면도, 걷는 장면도 아닙니다. 사토미가 전 여자친구와 사라지는 토모노리를 바라보며 책갈피를 손에 쥔 채 서 있는 그 몇 초입니다. 말 한마디 없는데 감정이 다 보였습니다.
이 영화가 문제를 해결해주는 영화는 아닙니다. 오히려 하루 동안 쌓인 감정이 어디에도 닿지 못하고 흘러가버리는 걸 보여주는 영화입니다. 근데 그게 이상하게 위로가 되기도 합니다. 목적 없이 흘려보낸 시간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이 영화가 궁금해지셨다면, 결말을 미리 찾아보지 말고 그냥 사토미처럼 흐름에 맡겨보시길 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