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봤을 때는 양조위만 보였습니다. 아휘의 눈빛, 아휘의 침묵, 아휘가 혼자 삼키는 감정들. 그런데 다시 본 「해피 투게더」는 달랐습니다. 화면 속에서 제가 놓쳤던 것은 보영이었고, 그를 다시 마주하고 나서야 이 영화가 왜 이렇게 오래 마음에 남았었는지 이해가 됐습니다. 해피 투게더, 왕가위의 미장센 왕가위 감독의 영화를 처음 접한 건 「중경삼림」이었습니다. 그때부터 느꼈던 것인데, 왕가위 감독은 이야기보다 감정의 질감을 먼저 찍는 사람입니다. 「해피 투게더」도 마찬가지였고, 직접 다시 보니 그것이 더 또렷하게 느껴졌습니다.영화의 원제는 「춘광사설(春光乍洩)」입니다. 구름 사이로 살짝 비치는 봄빛, 혹은 감추고 싶었던 비밀이 스며 나온다는 뜻입니다. 제목 자체가 이미 이 영화의 전부를 말해 주고 있습..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한 번쯤 "이 순간을 영원히 기억할 거야"라고 말해본 적 있으신가요. 저는 〈아비정전〉을 처음 봤을 때 오히려 그 반대 느낌을 받았습니다. 아비가 수리진에게 건네는 1분의 약속은 사랑의 시작이 아니라, 상실을 미리 박제해두는 일종의 자기방어였습니다. 왕가위 감독의 1990년 작 〈아비정전〉은 뿌리 없는 한 청년이 사랑도 정체성도 잃어가는 과정을 초록빛 습기 속에 가두어 둔 영화입니다. 발 없는 새 — 처음부터 예고된 결말영화는 시작과 동시에 결말을 슬며시 내보입니다. 안개 낀 열대 밀림이 느린 카메라에 실려 흐르고, 서정적인 기타 선율 위로 제목이 떠오릅니다. 처음엔 그냥 분위기 연출이라고 생각했는데, 영화가 끝나고 나서야 그 밀림이 아비가 죽기 직전 기차 차창 밖으로 바라본 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