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대 없이 봤다가 끝나고 한동안 멍하니 앉아있었으니까요. 대만 영화 을 원작으로 한 일본 리메이크작인데, '1초 빠른 남자'와 '1초 느린 여자'라는 설정만으로 이렇게 많은 걸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게 신기했습니다. 교토의 작은 우체국, 멈춰버린 일요일, 그리고 오랫동안 쌓인 편지들. 빠르게 흘러가는 것들 사이에서 느리게 기다려온 마음이 어떻게 닿는지, 이 영화는 그것을 아주 천천히 보여줍니다. 교토 감성과 시간 설정 저는 이 영화를 보면서 처음 든 생각은 "이게 말이 되나?"였습니다. 이름의 획 수가 많을수록 살면서 허비한 시간이 쌓이고, 그 보상으로 세상이 멈추는 날이 생긴다는 설정입니다. 쉽게 말해 획수보상론(劃數補償論)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이 장치는, 한 획짜리 이름 '一(하지메)'를 가진 남주..
낯선 사람과 하루를 온전히 시간을 보낸다는 게 낭만일까요, 아니면 그냥 시간 낭비일까요. 저는 이 영화를 보면서 꽤 오래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일본 영화 "흐르는대로"는 어떤 사건도, 극적인 반전도 없이 그냥 두 사람이 걷고 말하고 또 걷는 하루를 따라갑니다. 그런데 다 보고 나서 이상하게 뭔가 남더라고요. 끌림 영화는 버스 안에서 시작합니다. 주인공 사토미(카라타 에리카)가 옆자리 낯선 남자 토모노리(엔도 유야)의 책을 슬쩍 훔쳐보는 장면인데요. 제가 본 첫인상은 "아 맞아, 저 상황 나도 해봤다"였습니다. 요즘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종이책 읽는 사람 보면 괜히 눈이 가잖아요. 딱 그 감각으로 영화가 시작됩니다.토모노리가 버스에서 내리면서 책갈피를 떨어뜨리고, 사토미는 그걸 줍습니다. 이 장면이 영화..
솔직히 저는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 "첫사랑의 환상"이라는 게 이렇게까지 사람을 망가뜨릴 수 있다는 걸 몰랐습니다. 카라타 에리카의 눈빛만 보고 보기시작했다가, 중반부터 뒷목을 잡았습니다. 얼굴만 똑같이 생긴 두 남자 사이에서 갈피를 못 잡는 여자의 이야기, 일본 영화 입니다. 첫사랑의 환상, 도플갱어 로맨스영화는 오사카의 한 사진전에서 시작됩니다. 대학생 아사코는 그곳에서 바쿠라는 남자를 만나는데, 이 남자가 접근하는 방식이 심상치 않습니다. 처음 본 사람한테 이름을 물어보고, 거의 바로 키스를 시도합니다. 제가 봤을 때 이건 현실이었다면 경찰서행이 맞습니다. 그런데 잘생기면 다 됩니다. 영화의 법칙이죠.바쿠는 전형적인 충동적 직진형 인물입니다. 흔히 영화에서 말하는 '자유로운 영혼(free spi..
2004년 일본 극장에서 46,616,207달러를 벌어들인 영화가 있습니다. 저는 이 숫자보다 더 놀라운 것은, 개봉 20년이 지난 지금도 비가 오는 날이면 이 영화 제목이 검색창을 오르내린다는 것입니다. 그 영화가 바로 입니다. 처음 봤을 때는 그냥 예쁜 러브스토리인줄 알았는데, 두 번째 볼 때 미오가 내린 선택의 무게를 비로소 제대로 느꼈습니다. 줄거리와 결말 영화는 사실 결말부터 보여줍니다. 곧 18살이 될 유지가 케이크 가게에서 생일 케이크를 받는 장면으로 시작되는데, 이게 단순한 프롤로그가 아닙니다. 이 첫 장면 하나가 영화 전체의 핵심을 조용히 품고 있다는 걸 나중에야 알게 됩니다.엄마 미오를 잃은 타쿠미는 여섯 살 아들 유지와 단둘이 살아갑니다. 공황장애(Panic Disorder)를 앓..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자전적 소설 『연인』은 1984년 프랑스 최고 권위의 문학상인 공쿠르상(Prix Goncourt)을 수상하며 전 세계에 알려졌습니다. 장 자크 아노 감독이 1992년에 스크린으로 옮겼습니다. 식민지 베트남이라는 이국적이고 쓸쓸한 풍경 속에서, 가난한 프랑스 소녀와 부유한 중국인 남자의 만남. 지독한 열병과 같았던 그리움을 한 폭의 수채화처럼 가슴 시리게 담아낸 작품입니다. 시대적 결핍이 만들어낸 구조영화는 식민지(Colonial Society) 체제 아래 놓인 1920년대 후반 베트남 사이공을 배경으로 합니다. 식민지 체제란 지배국이 피지배 지역의 경제·문화·정치를 장악하는 구조를 말하는데, 영화 속 소녀(제인 마치)의 삶은 그 체제 안에서 이중으로 소외되어 있습니다. 프랑스인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