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개봉한 일본 영화, 청춘의 고단한 삶을 그린 영화. 솔직히 처음엔 그냥 맘에 드는 배우, 아오이 유우가 나와서 보기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보고 나서 꽤 오랫동안 여운이 남았습니다. 낭만적인 자아 찾기 여행이 아니라, 아무도 자신을 모르는 곳에서 다시 시작하려는 한 여자의 이야기였으니까요. 상처받기 전에 먼저 떠나는 게 강함인지, 아니면 그냥 도망인지. 이 영화는 그 경계를 조용히 알려줍니다. 전과자가 되기까지 일반적으로 영화 속 주인공이 전과자가 되는 장면은 극적인 선택이나 큰 사건에서 비롯됩니다. 그런데 제가 이 영화를 보면서 예상 밖이었던 건, 스즈코의 전과가 사실상 그녀 다운 선택에서 나왔다는 점이었습니다.전문대를 졸업하고도 직장을 구하지 못한 채 패밀리 레스토랑 아르바이트로 버티..
문학상을 받은 지 15년이 지나도록 두 번째 소설을 쓰지 못한 남자. 꿈과 현실 사이 어딘가에서 발이 묶인 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료타. 가족의 회복을 원하지만 맘대로 되지않습니다. 이 영화는 삶이 그렇게 거창할 필요는 없다고 조용하고 차분하게 알려줍니다. 앞으로 나아가고 있으면 되는 것이라고요. 료타라는 인물이 불편한 이유영화 의 주인공 료타(아베 히로시)는 흔히 말하는 '공감형 주인공'과는 거리가 멉니다. 한때 신인 문학상을 받으며 주목받았지만 지금은 사설 흥신소에서 탐정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소설 취재를 위한 것"이라는 핑계를 스스로 하면서요. 저도 비슷한 자기 합리화를 많이 해왔던지라 보면서 웃음이 났습니다.더 문제는 흥신소에서 번 돈을 경마로 탕진하고, 전처 쿄코(마키 요코)에게..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이미 답을 안다고 생각했습니다. 불길이 치솟는 하천부지, 무표정하게 자리를 뜨는 남자. 누가 봐도 명백한 장면이었으니까요. 그런데 두 시간이 지난 뒤, 나의 생각은 "나는 아무것도 몰랐다"였습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은 친절하게 하나하나 알려주지 않습니다. 판단은 관객의 몫입니다. 법정 드라마 이 영화가 단순한 법정 드라마인 줄 알았습니다. 엘리트 변호사가 전과자를 변호하고, 우여곡절 끝에 극적인 무죄 판결을 받아내는 그런 류의 이야기라고 짐작했죠. 그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습니다.변호사 시게모리(후쿠야마 마사하루)는 미스미(야큐쇼 코지)를 처음 만나는 순간부터 통제권을 잃기 시작합니다. 미스미는 첫 접견에서 도박 빚을 갚으려 사장을 죽였다고 실토하지만, 시게모리는 이를 해..
영화에서 진짜 괴물이 나올까요? 저는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이 영화를 봤는데, 상영이 끝나고도 한참 동안 자리에 앉아있었습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괴물》은 누군가를 범인으로 지목하는 영화가 아니라, 우리가 얼마나 손쉽게 누군가를 괴물로 만들어버리는지를 보여주는 영화입니다. 그 불편한 진실이 오래 마음 속에 남았습니다. 다시점 구조, 확증 편향 영화는 세 개의 파트로 나뉩니다. 엄마 사오리의 시점, 담임교사 호리의 시점, 그리고 아이들인 미나토와 요리의 시점. 같은 사건이 세 번 반복되지만, 볼 때마다 전혀 다른 이야기처럼 느껴집니다. 이 구조를 흔히 다시점 서사(多視點 敍事)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다시점 서사란 하나의 사건을 서로 다른 인물의 관점에서 반복 서술함으로써, 고정된 진실이란 존재하지 않음을..
핏줄이 아니면 가족이 아닐까요. 이 영화를 보고 나서 한동안 의문이 남았습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은 2018년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작품으로, 도둑질로 하루를 버티는 가짜 가족의 해체 과정을 통해 진짜 관계란 무엇인지 묵직하게 던집니다. 영화를 보는 내내 나도 모르게 이 위태로운 사람들을 응원하고 있었습니다. 영화 속 서스펜스의 정체영화는 두 남자가 마트에서 물건을 훔치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범죄 스릴러처럼 출발하지만, 이내 분위기는 전혀 달라집니다. 오사무와 소년 쇼타가 집으로 돌아가던 길에 아파트 베란다에서 혼자 추위에 떨고 있는 네 살배기 유리를 발견하는 순간부터, 이 영화의 진짜 긴장감이 시작됩니다.여기서 작동하는 감정이 바로 내러티브 서스펜스(Narrative Suspense..
국가가 75세 이상 노인에게 안락사를 권유하는 제도를 배경으로,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2시간 내내 숨죽이며 따라가게 만드는 영화. 일본 개봉 후 한국에도 소개된 이 작품은 칸 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 카메라 도르 특별 표창, 제95회 아카데미 국제 장편영화상 후보에 오를 만큼 묵직한 울림을 국제 사회에 남겼습니다. '친절한 죽음' — 플랜 75 일반적으로 안락사(euthanasia)라고 하면 말기 환자가 극심한 고통을 피하기 위해 선택하는 마지막 수단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여기서 안락사란 의학적으로 회복 불가능한 상태에서 본인의 자발적 의사로 생을 마감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그러나 속 제도는 이와 결이 다릅니다. 건강 진단도, 의사 소견도, 가족 동의도 필요 없습니다. 75..
빚쟁이한테 돈을 갚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빚쟁이한테 돈을 받으며 같이 산책을 한다면 어떨까요? 이 영화는 특유의 엉뚱한 유머와 잔잔함이 있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마음이 뭉클해 지는 영화. 일본 영화 '텐텐(轉轉)'은 정처없이 이리저리 걷는 그런 영화입니다. 빚쟁이와 산책, 이상한 설정 빚쟁이가 채무자한테 100만 엔을 주면서 같이 걷자고 하는 설정이 처음에는 너무 이상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영화를 처음부터 끝까지 보고 나니 그 설정이 아주 정교하게 잘 짜여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대학교 8학년 후미야(오다기리 죠)는 어릴 적 부모에게 버림받고 혼자 살아가는 인물입니다. 학자금을 마련하려다 사채에 손을 댔고, 결국 84만 엔이라는 빚더미에 앉아 몸을 팔아야 할지도 모를 상황까지 몰립니다. 그 ..
큰 기대 없이 봤다가, 어느 장면에서 눈물이 한 방울 툭 떨어졌습니다. 나카야마 미호 주연의 영화 는 화려한 사건도, 극적인 반전도 없습니다. 그런데 왜인지 보고 나면 오래 마음에 남습니다. 파리라는 도시와 구두라는 소품이 어떻게 한 사람의 내면을 조용히 해체하고 다시 조립하는지, 보고느낀 감상을 솔직하게 적어봤습니다. 새 구두를 사야 해, 파리 로케이션 처음엔 그냥 배경이 예쁜 영화겠거니 했습니다. 파리 배경 영화라 하니 에펠탑 야경에 몽마르트르 언덕. 그런데 이 영화는 달랐습니다. 관광 명소를 찍는 것이 아니라 아오이가 실제로 살고 있는 파리, 그러니까 지하층 작업실이 있는 오래된 아파트와 단골 카페, 센 강 주변의 오후 햇살을 찍고 있었습니다.이 영화는 대부분의 장면을 파리 현지에서 직접 촬영한 ..
처음 이 영화를 봤을 때, 저는 그냥 잔잔한 힐링 영화 한 편 보고 자려고 했거든요. 그런데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쯤 저는 소파에 앉아 한동안 멍하니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무언가 크게 있었던 것도 아닌데, 가슴 한쪽이 꽉 차 있는 느낌.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는 그런 영화입니다. 배다른 자매 넷이 함께 살아가는 이야기인데, 왜 이렇게 기억에 남는지 그 이유를 한번 짚어보겠습니다. 바닷마을 다이어리, 가족의 정의 제가 이 영화를 두 번째 볼 때 비로소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첫 번째 관람에서는 카마쿠라의 아름다운 사계절 풍경과 네 배우의 앙상블에 정신이 팔려서, 정작 이 영화가 던지는 핵심 질문을 그냥 흘려보냈습니다. "가족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인데, 고레에다 감독은 이것을 절대 직접 말하..
한때 저도 출근길 지하철 안에서 이유 없이 눈물이 나오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불면증에 두통, 그리고 뭘 먹어도 맛이 없던 그 감각. 당시엔 그냥 번아웃이라고 치부했지만, 영화 '남편이 우울증에 걸렸어요'를 보고 나서야 그게 단순한 피로가 아니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011년 개봉된 이 일본 영화는 우울증을 앓는 남편 츠레와 그 곁을 지키는 만화가 아내 하루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무겁지 않습니다. 오히려 보고 나면 이상하게 숨통이 트입니다. 우울증, 사람을 무너뜨리는 방식 우울증(Major Depressive Disorder)이라고 하면 많은 분들이 갑자기 드러눕거나, 극단적인 선택을 생각하거나, 아주 극적인 증상을 먼저 떠올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기서 주요 우울장애란 2주 이상 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