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로 돌아가도 현실이 바뀌지 않는다면, 굳이 돌아갈 이유가 있을까요? 이 설정을 알았을 때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영화를 다 보고 나서 오히려 그 규칙이 이 영화의 전부라는 걸 알게 됐습니다. 일본영화 〈커피가 식기 전에〉, 조용한 주말 오후에 혼자 봤는데 결말 즈음에서 눈물이 났습니다. 굴곡 없는 영화를 좋아하는 저한테는 꽤 오랜만에 제대로 마음에 박힌 작품이었습니다. 타임슬립 설정 이 영화는 타임슬립(time slip), 즉 시간 이동을 소재로 합니다. 여기서 타임슬립이란 특정 인물이 현재 시점을 벗어나 과거 혹은 미래의 시간대로 물리적으로 이동하는 판타지 장치를 의미합니다. 수많은 타임슬립 영화가 있지만 〈커피가 식기 전에〉가 독특한 이유는 그 조건이 유독 까다롭다는 점입니다.이 카페..
사랑하는 사람을 살리기 위해 시간을 100번 되돌린다면, 그게 진짜 사랑일까요, 아니면 집착일까요. 저는 이 영화를 보는 내내 그 경계 어딘가에서 계속 걸려 넘어졌습니다. 일본 영화 특유의 청량한 감성 위에 타임리프라는 판타지 장치를 얹은 작품, 입니다. 타임리프를 100번 반복해도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무엇이든 바꿀 수 있을 것 같지만, 이 영화는 처음부터 그 전제를 조용히 부숩니다.주인공 하세가와 리쿠(사카구치 켄타로)는 '인생 레코드'라는 장치를 손에 넣으면서 타임리프 능력을 갖게 됩니다. 여기서 타임리프(time leap)란 특정 시점으로 의식이나 기억을 되돌려 과거의 상황을 다시 경험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SF 장르에서 자주 쓰이는 개념인데, 이 영화에서는 그것을 낡은 레코드판이라는 아..
처음 이 영화를 봤을 때, 저는 스토리보다 화면에 가득 찬 음식에만 눈이 갔습니다. 영하 54도 남극 기지에서 튀김이라니, 라멘이라니. 그런데 두 번째로 다시 봤을 때는 달랐습니다. 음식 너머로 사람 냄새가 진하게 배어 있었습니다. 극한의 고립감 속에서 인간이 어떻게 버티는지, 그리고 한 그릇의 밥이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2009년작 를 보고 다시 감동을 받았습니다. 고립감이 사람을 어떻게 바꾸는가영화의 배경은 1997년 일본 남극 돔 후지 기지입니다. 해발 3,810m, 평균 기온 영하 54도. 연안의 쇼와 기지에서 약 1,000km 떨어진 내륙 오지입니다. 펭귄도, 바다표범도, 심지어 바이러스조차 생존할 수 없는 곳이라는 설명이 영화 초반에 나오는데, 제가 처음 들었을 때 그냥 웃어넘겼습니다...
솔직히 저는 이 영화 초반부는 너무 심심하게 느껴졌습니다. 특별한 사건이 없어서 단조로웠거든요. 그런데 끝까지 보니, 가슴이 먹먹했습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는 장남의 기일에 모인 하루동안의 가족의 이야기입니다. 극적인 사건은 없지만 그 속에 아주 날카로운 진실이 숨어 있었습니다. 가족애도, 우리를 불편하게 만드는 이유영화를 보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가족, 어딘가에서 본 것 같다.' 아버지 쿄헤이는 의사로서의 삶에 모든 자부심을 걸었던 사람입니다. 장남 준페이가 세상을 떠나고 나서도, 차남 료타에게 의업을 이어 달라는 기대를 내려놓지 못합니다. 겉으로는 말을 아끼지만, 료타가 미술품 복원 일을 한다고 하면 식탁에 미묘한 침묵이 깔립니다. 저도 겪어봤는데, 그 침묵이 백 마디 잔..
범인을 찾는 이야기라기 보다는 왜 그 범죄를 저질렀는지를 말해주는 영화. 저는 이 영화를 보고 엔딩 장면에서 멍하니 있었습니다. 안타깝다고 해야할지, 당연한 결말이라고 해야할지. 완벽한 논리로 쌓아올린 사랑이 결국 그 논리 때문에 무너지는 장면을 보고 나니, 한참동안 말문이 막혔습니다. 와이더닛, 알리바이 트릭보통 추리물은 "누가 죽였나"를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진실에 도달합니다. 범인을 특정하는 순간 카타르시스가 온다는 게 장르의 오래된 공식이죠. 그런데 이 영화는 처음부터 범인을 보여주고 시작합니다. 관객은 야스코 모녀가 우발적으로 전남편 도가시를 살해했다는 사실을 처음부터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영화가 던지는 화두는 전혀 다른 곳에 있습니다.여기서 와이더닛(Whydunit)이라는 개념이 ..
2004년 일본 극장에서 46,616,207달러를 벌어들인 영화가 있습니다. 저는 이 숫자보다 더 놀라운 것은, 개봉 20년이 지난 지금도 비가 오는 날이면 이 영화 제목이 검색창을 오르내린다는 것입니다. 그 영화가 바로 입니다. 처음 봤을 때는 그냥 예쁜 러브스토리인줄 알았는데, 두 번째 볼 때 미오가 내린 선택의 무게를 비로소 제대로 느꼈습니다. 줄거리와 결말 영화는 사실 결말부터 보여줍니다. 곧 18살이 될 유지가 케이크 가게에서 생일 케이크를 받는 장면으로 시작되는데, 이게 단순한 프롤로그가 아닙니다. 이 첫 장면 하나가 영화 전체의 핵심을 조용히 품고 있다는 걸 나중에야 알게 됩니다.엄마 미오를 잃은 타쿠미는 여섯 살 아들 유지와 단둘이 살아갑니다. 공황장애(Panic Disorder)를 앓..
2008년 개봉한 일본 영화, 청춘의 고단한 삶을 그린 영화. 솔직히 처음엔 그냥 맘에 드는 배우, 아오이 유우가 나와서 보기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보고 나서 꽤 오랫동안 여운이 남았습니다. 낭만적인 자아 찾기 여행이 아니라, 아무도 자신을 모르는 곳에서 다시 시작하려는 한 여자의 이야기였으니까요. 상처받기 전에 먼저 떠나는 게 강함인지, 아니면 그냥 도망인지. 이 영화는 그 경계를 조용히 알려줍니다. 전과자가 되기까지 일반적으로 영화 속 주인공이 전과자가 되는 장면은 극적인 선택이나 큰 사건에서 비롯됩니다. 그런데 제가 이 영화를 보면서 예상 밖이었던 건, 스즈코의 전과가 사실상 그녀 다운 선택에서 나왔다는 점이었습니다.전문대를 졸업하고도 직장을 구하지 못한 채 패밀리 레스토랑 아르바이트로 버티..
한때 저도 출근길 지하철 안에서 이유 없이 눈물이 나오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불면증에 두통, 그리고 뭘 먹어도 맛이 없던 그 감각. 당시엔 그냥 번아웃이라고 치부했지만, 영화 '남편이 우울증에 걸렸어요'를 보고 나서야 그게 단순한 피로가 아니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011년 개봉된 이 일본 영화는 우울증을 앓는 남편 츠레와 그 곁을 지키는 만화가 아내 하루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무겁지 않습니다. 오히려 보고 나면 이상하게 숨통이 트입니다. 우울증, 사람을 무너뜨리는 방식 우울증(Major Depressive Disorder)이라고 하면 많은 분들이 갑자기 드러눕거나, 극단적인 선택을 생각하거나, 아주 극적인 증상을 먼저 떠올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기서 주요 우울장애란 2주 이상 지..
영화를 다 보고 나서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습니다. 정확히는 료타가 카메라 메모리를 열어보는 그 장면에서 뭔가가 무너지는 느낌이었는데, 왜 그런지 한참 후에야 정리가 됐습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는 핏줄과 시간 사이에서 "진짜 아버지란 무엇인가"를 묻는 영화입니다. 결말의 카메라 사진 한 컷이 그 질문에 가장 잔인하고 정확하게 답하고있습니다. 엘리트 아버지 료타, 그리고 6년의 균열처음에는 료타가 그냥 나쁜 아버지 캐릭터로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보면 볼수록 그가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 보입니다. 그는 나름의 방식으로 최선을 다하고 있었고, 그 방식이 문제였던 것입니다.대형 건설사 엘리트 사원 료타(후쿠야마 마사하루)는 아내 미도리, 아들 케이타와 함께 삽니다. 흠잡을 곳 없는 아파트,..
2003년 개봉한 이누도 이신 감독의 은 일본 로맨스 영화 역사상 손꼽히는 걸작으로, 개봉 20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이별 영화 추천" 목록에서 빠지지 않습니다. 저도 처음 이 영화를 본 것이 10년 전쯤인데,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합니다. 사랑이 식어가는 과정을 이렇게 담담하게, 그리고 이렇게 아프게 찍을 수 있다는 것이 신기했습니다. 유모차 안에서 세상을 바라보던 소녀조제라는 인물을 처음 마주쳤을 때 솔직히 좀 당황했습니다. 할머니가 끄는 유모차 안에 성인 여성이 누워 있고, 접근하는 낯선 이에게 칼을 휘두르는 장면이 첫인상이었으니까요. 그런데 보다 보면 그 유모차가 단순한 이동 수단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조제에게 유모차는 일종의 안전 캡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