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3시간 37분짜리 영화를 보면서 저는 계속 범인을 추리하고 있었거든요.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순간, 그 시간 내내 제가 해온 탐정 놀이가 얼마나 쓸모없는 짓이었는지 깨달았습니다. 아오야마 신지의 는 그런 영화입니다. 범죄 미스터리인 척 위장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밥 한 끼와 침묵 하나로 사람이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담담하게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식구가 되는 방식제가 이 영화를 보면서 가장 먼저 떠올린 단어가 '식구(食口)'였습니다. 한국어에서 식구란 한 솥에서 밥을 나눠 먹는 사람들을 뜻합니다. 혈연이 아니어도, 같은 공간에서 밥을 함께 먹는 관계라면 식구가 됩니다. 는 일본 영화인데도 이 개념을 이보다 더 잘 구현하기 어렵겠다 싶을 만큼, 공동식사(共同食事)를 통한 유..
이건 정말 예상 밖이었습니다. 첫 장면에서 초라한 중년 아저씨 하나가 혼자 중얼거리는 모습을 보고 '이게 스릴러 맞나?' 싶었거든요. 그런데 5분도 채 안 돼서 사토 지로의 연기에 완전히 끌려들어가고 말았습니다. 일본영화 〈폭탄〉은 재일 한국인 3세 작가 오승호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취조실 한 칸에서 도쿄 전체를 흔드는 심리전을 그려낸 서스펜스 스릴러입니다. 사토 지로가 만들어낸 취조실의 심리전제가 영화를 보면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이 작품이 '범인을 잡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스즈키 타고사쿠는 술에 취해 자판기를 부수고 점원을 폭행한 혐의로 경찰서에 끌려온 인물인데, 처음에는 그냥 어눌하고 모자라 보이는 잡범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한 시간 뒤 도쿄에서 폭발이 일어난다"고 ..
타임리프 영화라고 하면 으레 '범인은 누구인가'라는 미스터리에 집중할 거라 생각했는데, 막상 보고 나니 제 머릿속에 남은 건 살인범 추적이 아니라 외톨이 여자아이 히나즈키 카요와 함께했던 평범한 하루들이었습니다. 2016년 개봉한 《나만이 없는 거리》, 기대와 실제 사이에서 꽤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든 작품입니다. 타임리프라는 설정 타임리프(time leap)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과거의 특정 시점으로 이동하는 현상을 말합니다. 쉽게 말해 단순히 시간을 되감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기억과 의식을 그대로 가진 채 과거의 몸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 영화에서는 이 능력을 '리바이벌'이라고 부릅니다.리바이벌이란 주변에 사고나 위험이 임박했을 때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시간이 되돌아가는 현상입니다. 주인..
범죄자를 죽이는 사람이 과연 살인자일까요, 아니면 영웅일까요. 저는 이 질문에 쉽게 답하지 못한 채 영화를 끝까지 봤습니다. 2006년 개봉한 일본 실사화 영화 데스노트는 가네코 슈스케 감독, 후지와라 타츠야와 마츠야마 켄이치가 주연을 맡은 작품으로, 만화 원작이 워낙 레전드급인 덕분에 제목 모르는 사람을 찾기가 더 어려울 정도입니다. 원작 만화는 12권 완결임에도 3천만 부 이상을 판매한 작품인 만큼, 기대와 두려움을 안고 봤던 영화였습니다. 원작 비교 솔직히 말하면, 저는 이 영화를 개봉 시점이 아닌 한참 뒤에야 봤습니다. 데스노트라는 단어 자체가 이미 일상 언어처럼 쓰이고 있으니 굳이 영화까지 찾아볼 이유를 못 느꼈던 것이죠. 그런데 어느 날 문득 원작의 팬으로서 영화 버전을 제대로 봐야겠다는 생각..
과거로 돌아가도 현실이 바뀌지 않는다면, 굳이 돌아갈 이유가 있을까요? 이 설정을 알았을 때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영화를 다 보고 나서 오히려 그 규칙이 이 영화의 전부라는 걸 알게 됐습니다. 일본영화 〈커피가 식기 전에〉, 조용한 주말 오후에 혼자 봤는데 결말 즈음에서 눈물이 났습니다. 굴곡 없는 영화를 좋아하는 저한테는 꽤 오랜만에 제대로 마음에 박힌 작품이었습니다. 타임슬립 설정 이 영화는 타임슬립(time slip), 즉 시간 이동을 소재로 합니다. 여기서 타임슬립이란 특정 인물이 현재 시점을 벗어나 과거 혹은 미래의 시간대로 물리적으로 이동하는 판타지 장치를 의미합니다. 수많은 타임슬립 영화가 있지만 〈커피가 식기 전에〉가 독특한 이유는 그 조건이 유독 까다롭다는 점입니다.이 카페..
사랑이 끝났을 때, 우리는 정말 그 사람을 떠나보낼 수 있을까요? 2004년 일본 영화 는 첫사랑을 잃은 한 남자의 이야기를 통해 바로 그 질문을 정면으로 던집니다. 저는 이 영화를 보고 나서 며칠 동안 멍한 상태로 지냈습니다. 슬퍼서가 아니라, 뭔가 오래된 감정이 건드려진 것 같은 느낌 때문이었습니다. 줄거리 영화는 결혼을 앞둔 사쿠타로(오오사와 타카오 분)의 시점에서 시작됩니다. 약혼녀 리츠코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지고, 그는 직감적으로 그녀가 향한 곳이 자신의 고향임을 알아챕니다. 여기서 이미 영화는 심상치 않은 예고를 던집니다. 왜 그녀는 말 한마디 없이 떠났을까요?시간은 1980년대 중반, 고등학생 시절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어린 사쿠타로(모리야마 미라이 분)는 같은 반 아키(나가사와 마사미 ..
낯선 사람과 하루를 온전히 시간을 보낸다는 게 낭만일까요, 아니면 그냥 시간 낭비일까요. 저는 이 영화를 보면서 꽤 오래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일본 영화 "흐르는대로"는 어떤 사건도, 극적인 반전도 없이 그냥 두 사람이 걷고 말하고 또 걷는 하루를 따라갑니다. 그런데 다 보고 나서 이상하게 뭔가 남더라고요. 끌림 영화는 버스 안에서 시작합니다. 주인공 사토미(카라타 에리카)가 옆자리 낯선 남자 토모노리(엔도 유야)의 책을 슬쩍 훔쳐보는 장면인데요. 제가 본 첫인상은 "아 맞아, 저 상황 나도 해봤다"였습니다. 요즘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종이책 읽는 사람 보면 괜히 눈이 가잖아요. 딱 그 감각으로 영화가 시작됩니다.토모노리가 버스에서 내리면서 책갈피를 떨어뜨리고, 사토미는 그걸 줍습니다. 이 장면이 영화..
타임리프 설정의 영화라고 하면 대부분 화려한 액션이나 복잡한 퍼즐 같은 구조를 먼저 떠올리기 마련입니다. 저도 처음엔 그랬습니다. 그런데 《나만이 없는 거리》를 보고 나서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이 영화가 진짜로 하려는 이야기는 과거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혼자였던 아이 곁에 누군가가 있어줬다면 어땠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리바이벌이라는 능력 타임리프(time leap)라는 개념, 즉 시간을 거슬러 과거로 이동하는 능력을 다루는 작품은 이미 많습니다. 일반적으로 이런 설정에서 주인공은 능력을 자유롭게 제어하고, 원하는 시점으로 돌아가 상황을 유리하게 바꿉니다. 그런데 이 영화의 주인공 후지누마 사토루가 가진 리바이벌은 그런 개념이 아닙니다. 여기서 리바이벌이란 사토루 본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주변..
솔직히 저는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 실종 가족이 언론에 나오는 모습을 보면서 그냥 안타깝다고만 생각했습니다. 그 이상은 생각하지 않았던 거죠. 2024년 일본 영화 미싱(Missing)은 그 안일한 시선을 완전히 부숴버린 작품이었습니다. 범인을 잡는 스릴러가 아니라, 아이를 잃은 가족이 무너져 가는 과정을 현실을 과장 없이 있는 그대로 재현하는 방식으로 담아낸 영화입니다. 실종가족이 겪는 진짜 고통 영화는 딸 미우가 실종된 지 3개월이 지난 시점에서 시작됩니다. 엄마 사오리(이시하라 사토미)와 아빠 유타카(아오키 무네타카)는 매일 전단지를 들고 거리를 헤맵니다. 조그마한 단서라도 있으면 몸을 먼저 움직이고, 경찰서를 수시로 들러 확인하고, 방송국 문을 두드립니다. 제가 이 장면들을 보면서 느낀 건 '처..
솔직히 저는 이런 류의 영화를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불치병, 이별, 죽음. 예상 가능한 공식에 이미 면역이 생겨버린 탓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벚꽃 같은 나의 연인》을 보고 나서 화면 앞에서 코를 풀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일본의 라이징 스타 나카지마 켄토와 마츠모토 호노카가 주연을 맡은 이 영화, 뻔한 걸 알면서도 결국 보고야 마는 이야기입니다. 두 사람이 "마법사"라고 부르는 직업 영화를 보기 전에 원작 소설을 먼저 읽었습니다. 우야마 게이스케의 동명 소설인데, 소설을 평소에 잘 읽지 않는 제가 끝까지 읽어봤을 만큼 국내에서도 제법 알려진 작품입니다. 그래서 영화를 볼 때 원작과 어떤 부분이 살아남고 어떤 부분이 사라졌는지를 자연스럽게 비교하게 됐는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원작에서 느꼈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