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개봉한 일본 영화 플래티나 데이터, 히가시노 게이고의 원작 소설을 오오토모 케이시 감독이 스크린에 옮긴 작품입니다. 니노미야 카즈나리 주연이라는 소식 하나로 바로 찾아봤는데, 책으로 먼저 읽었던 터라 영화화 소식을 몰랐다는 게 오히려 더 반가운 놀라움이었습니다. DNA 한 조각으로 범인을 특정하는 시스템, 충분히 매력적인 영화입니다. DNA 프로파일링이 범죄 해결?영화의 핵심은 DNA 프로파일링(DNA Profiling) 시스템입니다. 여기서 DNA 프로파일링이란 범죄 현장에서 채취한 유전자 정보를 분석해 용의자의 신체적 특징과 신원을 역추적하는 기법을 말합니다. 현실에서도 이미 수사에 활용되고 있는 기술이지만, 영화 속 플래티나 데이터 시스템은 전 국민의 DNA를 국가가 미리 수집·등록해 ..
솔직히 저는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 일본 의료 미스터리 장르를 너무 만만하게 봤습니다. 치넨 미키토 원작이라는 것도 몰랐고, 그냥 병원 배경 스릴러 한 편 가볍게 보자는 심산이었는데요. 막상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제가 느낀 건 카타르시스가 아니라 묘한 찜찜함이었습니다. 그 찜찜함의 정체를 짚어보고 싶어서 이 글을 씁니다. 줄거리와 반전 영화는 의사 하야미 슈고(사카구치 켄타로)가 선배 코사카이의 부탁으로 타도코로 병원 야간 당직을 대신 맡으면서 시작됩니다. 제가 보기에 이 설정 자체는 꽤 좋습니다. 주인공이 병원 내부 사정을 전혀 모르는 외부인이기 때문에, 관객도 그와 동일한 시점에서 단서를 발견하게 되거든요.그런데 거기서부터 피에로 분장을 한 괴한이 총상을 입은 여성 히토미(나가노 메이)를 데리고..
솔직히 말하면, 처음 두 시간 넘는 러닝타임을 보고 살짝 겁을 먹었습니다. 대체 뭔 이야기길래 2시간 40분이나 하지, 싶어서 초반엔 딴생각도 했고요. 그런데 다 보고 나니 오히려 조금 더 있었으면 했습니다. 요노스케라는 사람이 그 정도로 마음 안에 들어와버렸거든요. 삼바 동아리, 착각, 그리고 요노스케영화는 1980년대 후반, 일본의 버블경제(バブル경제) 시절을 배경으로 합니다. 버블경제란 실체보다 자산 가격이 과도하게 부풀어 오른 경제 상태를 가리키는 말로, 당시 일본은 지가와 주가가 동시에 폭등하며 소비와 욕망이 극에 달한 시기였습니다. 영화는 그 시대의 헤어스타일과 옷차림, 거리 풍경까지 꼼꼼하게 복원해 놓아서 보는 내내 시대극을 보는 쾌감이 있었습니다.나가사키에서 도쿄로 올라온 요노스케는 대학..
포스터만 봤을 때 솔직히 별 기대가 없었습니다. 레이스와 프릴로 가득한 로리타 드레스를 입은 소녀 포스터가 영 유치해 보였거든요. 그런데 '스쿠터를 타는 폭주족 소녀와의 우정'이라는 줄거리 한 줄이 저를 붙잡았습니다. 나카시마 테츠야 감독의 《불량공주 모모코》(2004)는 그렇게 호기심 반, 의심 반으로 감상한 영화인데, 보고 나서 꽤 오래 머릿속에 남았습니다. 로리타 패션과 양키 문화 처음 이 영화를 보면 '색깔이 지나치다'는 느낌부터 옵니다. 화면은 지나치게 선명하고, 인물들은 현실보다 만화 캐릭터에 가깝게 움직입니다. 애니메이션이 불쑥 끼어들고, 장면이 갑자기 빨라지거나 되감기도 합니다. 저는 처음엔 '이게 뭐지' 싶었는데, 보다 보니 이 연출 자체가 영화의 메시지라는 걸 알게 됐습니다.일본의 평범..
그냥 가볍게 보려고 시작했던 영화였는데,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었네요. 꽃다발 같은 사랑을 했다는 취향이 꼭 닮은 두 사람이 만나 사랑하고, 그 사랑이 자연스럽게 끝나는 이야기입니다. 누구도 나쁜 사람이 아닌데 왜 이렇게 마음이 아픈지, 그 이유를 오래 생각하게 만드는 영화였습니다. 막차를 놓친 밤제가 처음으로 일본 영화관에서 본 애니메이션이 오시이 마모루 감독의 스카이 크롤러였습니다. 그 한 편이 제 진로를 바꿔놨을 정도였는데, 정작 이 영화 속에서 두 주인공이 오시이 마모루를 매개로 서로를 알아보는 장면에서 저는 한 박자 늦게 알아챘습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이 영화가 얼마나 섬세하게 설계돼 있는지를 실감했습니다.영화는 막차를 놓친 두 대학생, 무기와 키누가 첫차를 기다리며 함께 밤을 보내는 장면으로..
바디체인지 영화라고 하면 으레 웃음과 설렘이 가득한 로맨틱 코미디를 떠올리지 않습니까? 저도 그랬습니다. 그런데 극장에서 나오면서 제가 받아든 건 웃음이 아니라, 꽤 오랫동안 씹히는 묵직한 여운이었습니다. 2026년 일본 영화 는 바디체인지라는 소재를 쓰면서도, 그 결이 전혀 다른 방향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15년 바디체인지일반적으로 바디체인지물이라고 하면 며칠, 길어봤자 몇 주 안에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고 사랑에 빠지는 구조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건 좀 다릅니다. 에서 사카하라와 미즈무라의 몸이 바뀐 시간은 무려 15년입니다.열다섯 살 여름에 시작된 이 상황은 학교생활, 취업, 연애, 가족의 죽음까지 인생에서 가장 밀도 높은 순간들을 그대로 관통합니다. 처음에는 저도 "이 정도면 슬슬 해결되겠지" ..
1975년 '신칸센 대폭파'의 후속작으로 25년에 공개된 버전입니다. 저는 처음에 반신반의하면서 보게되었는데, 두 시간이 넘는 러닝타임이 전혀 길게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미국 액션 영화와는 결이 완전히 다른, 그러면서도 훨씬 묵직한 무언가를 남기는 영화였습니다. 직업윤리 신아오모리역을 출발해 도쿄로 향하는 신칸센 하야부사 60호(5060B)에 폭탄이 설치됩니다. 시속 100km 아래로 속도가 떨어지면 즉시 폭발한다는 조건입니다. 협박범은 자신의 말을 증명하기 위해 화물열차에도 동일한 폭탄을 설치했고, 실제로 터뜨려 보입니다. 요구 금액은 1,000억 엔, 한화로 약 1조 70억 원이었습니다.이 설정 자체는 '스피드'와 거의 같습니다. 그런데 이후 이야기가 전개되는 방식이 완전히 다릅니다. 미국 영화였다면..
솔직히 말하면, 저는 처음에 이 영화를 카메나시 카즈야가 나온다는 이유 하나로 보게되었습니다. 줄거리 확인을 안하고 봤어요. 그런데 막상 보고 나서 찜찜함이 꽤 오래 남았는데, 좋은 의미의 여운이 아니었습니다. 사이코패스 변호사가 주인공인데 응원이 안 되고, 살인마를 쫓는 프로파일러도 손에 땀을 쥐게 하지 못하는, 묘하게 감정을 어디에도 두기 어려운 영화였습니다. 사이코패스 변호사라는 설정이 영화의 출발점은 한 가지 설정에 기대고 있습니다. 주인공 니노미야 아키라(카메나시 카즈야)는 자칭 사이코패스입니다. 겉으로는 잘 차려입은 엘리트 변호사인데, 자신의 이익을 막는 사람은 가까운 사이라도 망설임 없이 제거하는 인물이에요. 여자친구 아버지를 건물에서 떨어뜨려 사무소를 손에 넣은 것도 그 연장선입니다.여기..
잘나가던 친구가 갑자기 사라졌을 때, 주변이 얼마나 흔들리는지 저는 고등학교 때 직접 겪어봤습니다. 그 애가 없으니까 우리 무리의 서열이 바뀌고, 점심 자리가 바뀌고. 요시다 다이하치 감독의 는 정확히 그 감성을 건드립니다. 2013년 일본 아카데미 최우수 작품상을 받은 이 영화, 보고 나서 한참 생각했습니다. 키리시마의 부재가 만든 균열영화는 배구부 에이스 키리시마가 동아리를 그만뒀다는 소식 하나로 시작합니다. 그런데 이상한 건, 키리시마가 화면에 단 한 번도 제대로 등장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 영화에서 키리시마는 일종의 맥거핀(MacGuffin)으로 기능합니다. 여기서 맥거핀이란 이야기를 움직이게 하는 장치이지만, 그 자체로는 실질적인 의미가 없는 요소를 말합니다. 알프레드 히치콕이 즐겨 쓰던 기..
혐오가 연대로 바뀌는 데 얼마나 걸릴까요. 2005년 일본 영화 《메종 드 히미코》는 그 질문에 꽤 정직하게 답합니다. 처음에는 돈 때문에 게이 양로원에 발을 들인 사오리가, 끝에는 자기 발로 그곳을 향해 걸어가는 이야기입니다. 제가 이 영화를 보고 오래 기억에 남은 건 줄거리가 아니라, 빛바랜 여름 색 같은 화면 분위기였습니다. 사오리의 감정변화 어릴 적 어머니와 자신을 버리고 떠난 아버지. 도장 회사에서 일하며 빚을 갚고 있는 딸 사오리 앞에 어느 날 낯선 남자가 찾아옵니다. 아버지 히미코의 연인 하루히코(오다기리 조)였습니다. 그가 꺼낸 제안은 말기 암 판정을 받은 히미코가 설립한 게이 양로원 '메종 드 히미코'에서 일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사오리가 일을 수락한 건 높은 일당과 유산에 대한 기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