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작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처음 봤을 때, 저는 그냥 잔잔한 일본 가족 영화 정도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극장을 나서는 내내 말을 잃었고, 집에 돌아와서도 한참 멍하니 앉아 있었습니다. 제78회 칸 영화제 경쟁 부문에 초청된 하야카와 치에 감독의 신작 《르누아르》는, 11세 소녀의 눈으로 죽음을 바라보는 영화입니다. 조용하고 담담하지만, 그 여운은 생각보다 훨씬 오래 남았습니다. 반자전적 성장 드라마일반적으로 성장 드라마라고 하면, 밝고 뜨거운 청춘의 서사를 떠올리기 쉽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르누아르》는 그 반대편에 서 있는 영화였습니다. 주인공 후키(스즈키 유이)가 성장하는 방식은 밝지도, 희망차지도 않습니다. 조금 서글프고, 조금 잔인하며, 무엇보다..
2013년 개봉한 일본 영화 플래티나 데이터, 히가시노 게이고의 원작 소설을 오오토모 케이시 감독이 스크린에 옮긴 작품입니다. 니노미야 카즈나리 주연이라는 소식 하나로 바로 찾아봤는데, 책으로 먼저 읽었던 터라 영화화 소식을 몰랐다는 게 오히려 더 반가운 놀라움이었습니다. DNA 한 조각으로 범인을 특정하는 시스템, 충분히 매력적인 영화입니다. DNA 프로파일링이 범죄 해결?영화의 핵심은 DNA 프로파일링(DNA Profiling) 시스템입니다. 여기서 DNA 프로파일링이란 범죄 현장에서 채취한 유전자 정보를 분석해 용의자의 신체적 특징과 신원을 역추적하는 기법을 말합니다. 현실에서도 이미 수사에 활용되고 있는 기술이지만, 영화 속 플래티나 데이터 시스템은 전 국민의 DNA를 국가가 미리 수집·등록해 ..
솔직히 저는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 일본 의료 미스터리 장르를 너무 만만하게 봤습니다. 치넨 미키토 원작이라는 것도 몰랐고, 그냥 병원 배경 스릴러 한 편 가볍게 보자는 심산이었는데요. 막상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제가 느낀 건 카타르시스가 아니라 묘한 찜찜함이었습니다. 그 찜찜함의 정체를 짚어보고 싶어서 이 글을 씁니다. 줄거리와 반전 영화는 의사 하야미 슈고(사카구치 켄타로)가 선배 코사카이의 부탁으로 타도코로 병원 야간 당직을 대신 맡으면서 시작됩니다. 제가 보기에 이 설정 자체는 꽤 좋습니다. 주인공이 병원 내부 사정을 전혀 모르는 외부인이기 때문에, 관객도 그와 동일한 시점에서 단서를 발견하게 되거든요.그런데 거기서부터 피에로 분장을 한 괴한이 총상을 입은 여성 히토미(나가노 메이)를 데리고..
솔직히 말하면, 처음 두 시간 넘는 러닝타임을 보고 살짝 겁을 먹었습니다. 대체 뭔 이야기길래 2시간 40분이나 하지, 싶어서 초반엔 딴생각도 했고요. 그런데 다 보고 나니 오히려 조금 더 있었으면 했습니다. 요노스케라는 사람이 그 정도로 마음 안에 들어와버렸거든요. 삼바 동아리, 착각, 그리고 요노스케영화는 1980년대 후반, 일본의 버블경제(バブル경제) 시절을 배경으로 합니다. 버블경제란 실체보다 자산 가격이 과도하게 부풀어 오른 경제 상태를 가리키는 말로, 당시 일본은 지가와 주가가 동시에 폭등하며 소비와 욕망이 극에 달한 시기였습니다. 영화는 그 시대의 헤어스타일과 옷차림, 거리 풍경까지 꼼꼼하게 복원해 놓아서 보는 내내 시대극을 보는 쾌감이 있었습니다.나가사키에서 도쿄로 올라온 요노스케는 대학..
솔직히 저는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 "장소 이동 한 번 없는 밀실 영화"가 이렇게 재밌을 수 있다는 걸 몰랐습니다. 제목만 봤을 땐 덕후 다섯 명이 모여서 죽은 아이돌 얘기를 울면서 하는 그런 영화인 줄 알았거든요. 직접 보니, 전혀 달랐습니다. 한 방에서 시작된 추모회영화는 D급 그라비아 아이돌 키사라기 미키의 1주기에 다섯 명의 남자가 팬사이트를 통해 만나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사이트 운영자 닉네임 이에모토(오구리 슌)가 주선한 모임으로, 참가자들은 각각 스네이크(코이데 케이스케), 오다 유지(유스케 산타마리아), 이치고 무스메(카가와 테루유키), 야스오(츠카지 무가)라는 닉네임만 달고 나타납니다.이 닉네임들 자체가 이미 개그의 시작입니다. 저는 유스케 산타마리아가 '오다 유지'라는 닉네임을 달고..
제목을 처음 봤을 때 솔직히 이게 영화 제목인지 의심했습니다. '사랑하고 사랑받고, 차고 차이고'라니, 막장 드라마 부제목 같기도 하고요. 그런데 막상 보고 나서는 꽤 오래 여운이 남았습니다. 사키사카 이오 원작 만화를 바탕으로 한 이 작품은, 소재만 놓고 보면 자극적이지만 실제로는 굉장히 조용하고 섬세한 청춘 로맨스 영화입니다. 엇갈린 감정이 만드는 줄거리처음에는 전형적인 청춘 멜로겠거니 싶었습니다. 제가 영화를 보기 전에 줄거리를 대충 훑었을 때만 해도 "짝사랑 네 명짜리 버전이구나" 정도로만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실제로 보니 이 영화의 핵심은 단순한 삼각관계나 사각관계가 아니었습니다.영화는 야마모토 아카리(하마베 미나미)와 이치하라 유나(후쿠모토 리코), 정반대 성격의 두 소녀가 같은 아파트 이웃..
바디체인지 영화라고 하면 으레 웃음과 설렘이 가득한 로맨틱 코미디를 떠올리지 않습니까? 저도 그랬습니다. 그런데 극장에서 나오면서 제가 받아든 건 웃음이 아니라, 꽤 오랫동안 씹히는 묵직한 여운이었습니다. 2026년 일본 영화 는 바디체인지라는 소재를 쓰면서도, 그 결이 전혀 다른 방향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15년 바디체인지일반적으로 바디체인지물이라고 하면 며칠, 길어봤자 몇 주 안에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고 사랑에 빠지는 구조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건 좀 다릅니다. 에서 사카하라와 미즈무라의 몸이 바뀐 시간은 무려 15년입니다.열다섯 살 여름에 시작된 이 상황은 학교생활, 취업, 연애, 가족의 죽음까지 인생에서 가장 밀도 높은 순간들을 그대로 관통합니다. 처음에는 저도 "이 정도면 슬슬 해결되겠지" ..
1975년 '신칸센 대폭파'의 후속작으로 25년에 공개된 버전입니다. 저는 처음에 반신반의하면서 보게되었는데, 두 시간이 넘는 러닝타임이 전혀 길게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미국 액션 영화와는 결이 완전히 다른, 그러면서도 훨씬 묵직한 무언가를 남기는 영화였습니다. 직업윤리 신아오모리역을 출발해 도쿄로 향하는 신칸센 하야부사 60호(5060B)에 폭탄이 설치됩니다. 시속 100km 아래로 속도가 떨어지면 즉시 폭발한다는 조건입니다. 협박범은 자신의 말을 증명하기 위해 화물열차에도 동일한 폭탄을 설치했고, 실제로 터뜨려 보입니다. 요구 금액은 1,000억 엔, 한화로 약 1조 70억 원이었습니다.이 설정 자체는 '스피드'와 거의 같습니다. 그런데 이후 이야기가 전개되는 방식이 완전히 다릅니다. 미국 영화였다면..
솔직히 말하면, 저는 처음에 이 영화를 카메나시 카즈야가 나온다는 이유 하나로 보게되었습니다. 줄거리 확인을 안하고 봤어요. 그런데 막상 보고 나서 찜찜함이 꽤 오래 남았는데, 좋은 의미의 여운이 아니었습니다. 사이코패스 변호사가 주인공인데 응원이 안 되고, 살인마를 쫓는 프로파일러도 손에 땀을 쥐게 하지 못하는, 묘하게 감정을 어디에도 두기 어려운 영화였습니다. 사이코패스 변호사라는 설정이 영화의 출발점은 한 가지 설정에 기대고 있습니다. 주인공 니노미야 아키라(카메나시 카즈야)는 자칭 사이코패스입니다. 겉으로는 잘 차려입은 엘리트 변호사인데, 자신의 이익을 막는 사람은 가까운 사이라도 망설임 없이 제거하는 인물이에요. 여자친구 아버지를 건물에서 떨어뜨려 사무소를 손에 넣은 것도 그 연장선입니다.여기..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극장에서 상영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만 해도 "1985년 일본 영화를 왜 지금?"이라는 의문부터 들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자리에 앉아 두 시간을 보내고 나서, 저는 한동안 좌석에서 일어나질 못했습니다. 소마이 신지 감독의 은 태풍이 몰아치는 주말, 학교에 고립된 중학생들의 하룻밤을 그리는 영화입니다. 그런데 이 영화가 진짜 말하고 싶은 건 비바람이 아닙니다. 바람도 왜곡을 풀지 못하고, 폭우도 결핍을 채우진 못한다는 것—태풍 끝에 남은 것이 무엇인지를, 영화는 끝까지 관객에게 되묻습니다. 작가주의 연출이 포착한 청춘의 실제 얼굴저는 영화를 보고, 처음 10분간은 당황스러웠습니다. 수영장에서 남학우를 로프로 묶어 물에 담갔다 꺼냈다 반복하는 아이들, 교복 차림으로 아무렇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