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임리프 영화라고 하면 으레 '범인은 누구인가'라는 미스터리에 집중할 거라 생각했는데, 막상 보고 나니 제 머릿속에 남은 건 살인범 추적이 아니라 외톨이 여자아이 히나즈키 카요와 함께했던 평범한 하루들이었습니다. 2016년 개봉한 《나만이 없는 거리》, 기대와 실제 사이에서 꽤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든 작품입니다. 타임리프라는 설정 타임리프(time leap)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과거의 특정 시점으로 이동하는 현상을 말합니다. 쉽게 말해 단순히 시간을 되감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기억과 의식을 그대로 가진 채 과거의 몸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 영화에서는 이 능력을 '리바이벌'이라고 부릅니다.리바이벌이란 주변에 사고나 위험이 임박했을 때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시간이 되돌아가는 현상입니다. 주인..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보기 전에 리뷰들을 훑었더니 서브남인 코스케를 앓는다는 한줄평이 유독 눈에 띄었거든요. 배우 얼굴을 미리 찾아봤을 땐 '잘생기긴 했지만 그렇게 내 취향은 아닌데' 하고 넘겼는데, 막상 영화를 보면서 30분도 안 돼 코스케밖에 안 보이는 제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2015년작 일본 순정만화 원작 영화 《히로인 실격》, 저처럼 서브남에게 자꾸 꽂히는 분들이라면 각오하고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서브남병 — 코스케가 남주보다 더 남주 같은 이유제게는 소위 '서브남병'이 있습니다. 여기서 서브남병이란, 로맨스물을 볼 때 최종 커플로 낙점된 남주인공보다 조력자 포지션의 서브 남성 캐릭터에게 더 강하게 감정이 이입되는 현상을 말합니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임을 알면서도 묵묵히 곁을..
범죄자를 죽이는 사람이 과연 살인자일까요, 아니면 영웅일까요. 저는 이 질문에 쉽게 답하지 못한 채 영화를 끝까지 봤습니다. 2006년 개봉한 일본 실사화 영화 데스노트는 가네코 슈스케 감독, 후지와라 타츠야와 마츠야마 켄이치가 주연을 맡은 작품으로, 만화 원작이 워낙 레전드급인 덕분에 제목 모르는 사람을 찾기가 더 어려울 정도입니다. 원작 만화는 12권 완결임에도 3천만 부 이상을 판매한 작품인 만큼, 기대와 두려움을 안고 봤던 영화였습니다. 원작 비교 솔직히 말하면, 저는 이 영화를 개봉 시점이 아닌 한참 뒤에야 봤습니다. 데스노트라는 단어 자체가 이미 일상 언어처럼 쓰이고 있으니 굳이 영화까지 찾아볼 이유를 못 느꼈던 것이죠. 그런데 어느 날 문득 원작의 팬으로서 영화 버전을 제대로 봐야겠다는 생각..
처음엔 가볍게 볼 수 있는 청춘 댄스 무비라고 생각했습니다. 제목도 '훌라걸즈'고, 포스터도 밝고 화사했으니까요. 그런데 막상 보고 나니 전혀 달랐습니다. 1965년 폐광을 앞둔 탄광촌을 배경으로, 살아남기 위해 춤을 선택한 소녀들과 그것을 반대하는 어른들의 이야기였습니다. 2007년 개봉 이후 2026년 7월 재개봉 된 이 영화, 제가 보면서 느낀 것들을 솔직하게 적어봤습니다. 탄광촌 소녀들이 훌라를 선택한 이유제가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건, 키미코(아오이 유우)가 처음부터 춤에 열정이 있었던 게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냥 친구 사나에를 따라 얼떨결에 훌라댄스 팀에 들어간 거였거든요. 그런데 이게 오히려 더 현실적으로 느껴졌습니다. 인생의 전환점이라는 게 거창한 결심보다는 이렇게 우연히 시작되..
과거로 돌아가도 현실이 바뀌지 않는다면, 굳이 돌아갈 이유가 있을까요? 이 설정을 알았을 때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영화를 다 보고 나서 오히려 그 규칙이 이 영화의 전부라는 걸 알게 됐습니다. 일본영화 〈커피가 식기 전에〉, 조용한 주말 오후에 혼자 봤는데 결말 즈음에서 눈물이 났습니다. 굴곡 없는 영화를 좋아하는 저한테는 꽤 오랜만에 제대로 마음에 박힌 작품이었습니다. 타임슬립 설정 이 영화는 타임슬립(time slip), 즉 시간 이동을 소재로 합니다. 여기서 타임슬립이란 특정 인물이 현재 시점을 벗어나 과거 혹은 미래의 시간대로 물리적으로 이동하는 판타지 장치를 의미합니다. 수많은 타임슬립 영화가 있지만 〈커피가 식기 전에〉가 독특한 이유는 그 조건이 유독 까다롭다는 점입니다.이 카페..
기대 없이 봤다가 끝나고 한동안 멍하니 앉아있었으니까요. 대만 영화 을 원작으로 한 일본 리메이크작인데, '1초 빠른 남자'와 '1초 느린 여자'라는 설정만으로 이렇게 많은 걸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게 신기했습니다. 교토의 작은 우체국, 멈춰버린 일요일, 그리고 오랫동안 쌓인 편지들. 빠르게 흘러가는 것들 사이에서 느리게 기다려온 마음이 어떻게 닿는지, 이 영화는 그것을 아주 천천히 보여줍니다. 교토 감성과 시간 설정 저는 이 영화를 보면서 처음 든 생각은 "이게 말이 되나?"였습니다. 이름의 획 수가 많을수록 살면서 허비한 시간이 쌓이고, 그 보상으로 세상이 멈추는 날이 생긴다는 설정입니다. 쉽게 말해 획수보상론(劃數補償論)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이 장치는, 한 획짜리 이름 '一(하지메)'를 가진 남주..
사랑이 끝났을 때, 우리는 정말 그 사람을 떠나보낼 수 있을까요? 2004년 일본 영화 는 첫사랑을 잃은 한 남자의 이야기를 통해 바로 그 질문을 정면으로 던집니다. 저는 이 영화를 보고 나서 며칠 동안 멍한 상태로 지냈습니다. 슬퍼서가 아니라, 뭔가 오래된 감정이 건드려진 것 같은 느낌 때문이었습니다. 줄거리 영화는 결혼을 앞둔 사쿠타로(오오사와 타카오 분)의 시점에서 시작됩니다. 약혼녀 리츠코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지고, 그는 직감적으로 그녀가 향한 곳이 자신의 고향임을 알아챕니다. 여기서 이미 영화는 심상치 않은 예고를 던집니다. 왜 그녀는 말 한마디 없이 떠났을까요?시간은 1980년대 중반, 고등학생 시절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어린 사쿠타로(모리야마 미라이 분)는 같은 반 아키(나가사와 마사미 ..
낯선 사람과 하루를 온전히 시간을 보낸다는 게 낭만일까요, 아니면 그냥 시간 낭비일까요. 저는 이 영화를 보면서 꽤 오래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일본 영화 "흐르는대로"는 어떤 사건도, 극적인 반전도 없이 그냥 두 사람이 걷고 말하고 또 걷는 하루를 따라갑니다. 그런데 다 보고 나서 이상하게 뭔가 남더라고요. 끌림 영화는 버스 안에서 시작합니다. 주인공 사토미(카라타 에리카)가 옆자리 낯선 남자 토모노리(엔도 유야)의 책을 슬쩍 훔쳐보는 장면인데요. 제가 본 첫인상은 "아 맞아, 저 상황 나도 해봤다"였습니다. 요즘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종이책 읽는 사람 보면 괜히 눈이 가잖아요. 딱 그 감각으로 영화가 시작됩니다.토모노리가 버스에서 내리면서 책갈피를 떨어뜨리고, 사토미는 그걸 줍습니다. 이 장면이 영화..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극장 불이 켜지고 나서도 한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공포영화를 보고 나서야 느끼는 그 불쾌한 찝찝함이 남는 영화였습니다. 그런데 이 영화엔 귀신도 살인마도 없습니다. 있는 건 딱 하나, 너무나 그럴듯한 현실뿐이었습니다. 근미래 배경이 만들어낸 현재의 공포영화가 시작되자마자 저는 "아, 이건 SF가 아니구나"라는 걸 직감했습니다. 배경은 분명 근미래 도쿄입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지진이 발생하고, 점멸등이 일렁이는 불안정한 도시. 그런데 이 세계가 낯설지 않습니다. 오히려 지금 우리가 사는 세계에서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이 그대로 곪은 채 시간만 흐른 것처럼 보였습니다.학교에 AI 감시 체제가 도입되는 장면이 그 출발점입니다. 여기서 판옵티콘(Panopticon)..
타임리프 설정의 영화라고 하면 대부분 화려한 액션이나 복잡한 퍼즐 같은 구조를 먼저 떠올리기 마련입니다. 저도 처음엔 그랬습니다. 그런데 《나만이 없는 거리》를 보고 나서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이 영화가 진짜로 하려는 이야기는 과거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혼자였던 아이 곁에 누군가가 있어줬다면 어땠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리바이벌이라는 능력 타임리프(time leap)라는 개념, 즉 시간을 거슬러 과거로 이동하는 능력을 다루는 작품은 이미 많습니다. 일반적으로 이런 설정에서 주인공은 능력을 자유롭게 제어하고, 원하는 시점으로 돌아가 상황을 유리하게 바꿉니다. 그런데 이 영화의 주인공 후지누마 사토루가 가진 리바이벌은 그런 개념이 아닙니다. 여기서 리바이벌이란 사토루 본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주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