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별 기대 없이 골랐는데, 다 보고 나서 한참동안 여운이 남았습니다. 2025년 2월 개봉한 일본 영화 〈첫 번째 키스〉, 타임슬립 멜로라는 장르가 주는 뻔함을 알면서도 끝까지 몰입해서 보게 되었습니다. 죽음을 되돌리는 이야기가 아니라, 식어버린 사랑을 다시 들여다보는 이야기였습니다. 타임슬립이라는 장치저도 처음엔 그냥 타임슬립 멜로겠거니 했습니다. 타임슬립(time-slip)이란 주인공이 의도치 않게 다른 시간대로 이동하는 서사 장치인데, 쉽게 말해 시간여행의 일종입니다. 일본 영화에서 특히 자주 쓰이는 문법이라 익숙하기도 했고요.그런데 〈첫 번째 키스〉는 이 장치를 과거를 바꾸는 수단으로 쓰지 않습니다. 이혼 직전의 부부, 칸나와 카케루. 이혼 서류를 내는 그날 남편 카..
어른이 된다는 게 정말 성장한 것일까요. 저는 이 영화를 보고 나서 한동안 그 질문을 머릿속에서 떨쳐낼 수가 없었습니다. 영화 는 2021년 공개 직후 잔잔하게, 그러나 꽤 깊숙이 마음을 건드렸던 작품입니다. 광고와 뮤직비디오로 영상 감각을 쌓아온 모리 요시히로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완성도 있는 연출이었습니다. 시간을 거꾸로 걸어가는 남자의 이야기처음엔 이 영화가 '그냥 첫사랑 회상 멜로드라마겠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시작하자마자 예상이 완전히 빗나갔습니다.영화는 역연대기적 구성(reverse chronological structure), 그러니까 현재에서 과거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방식으로 서사를 이어갑니다. 여기서 역연대기적 구성이란 결말에서 출발해 점점 원인을 향..
잘나가던 친구가 갑자기 사라졌을 때, 주변이 얼마나 흔들리는지 저는 고등학교 때 직접 겪어봤습니다. 그 애가 없으니까 우리 무리의 서열이 바뀌고, 점심 자리가 바뀌고. 요시다 다이하치 감독의 는 정확히 그 감성을 건드립니다. 2013년 일본 아카데미 최우수 작품상을 받은 이 영화, 보고 나서 한참 생각했습니다. 키리시마의 부재가 만든 균열영화는 배구부 에이스 키리시마가 동아리를 그만뒀다는 소식 하나로 시작합니다. 그런데 이상한 건, 키리시마가 화면에 단 한 번도 제대로 등장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 영화에서 키리시마는 일종의 맥거핀(MacGuffin)으로 기능합니다. 여기서 맥거핀이란 이야기를 움직이게 하는 장치이지만, 그 자체로는 실질적인 의미가 없는 요소를 말합니다. 알프레드 히치콕이 즐겨 쓰던 기..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는 이 영화를 보고 나서 한참 동안 감정정리가 안됐습니다. 1945년 8월 14일부터 15일까지, 딱 24시간 안에 일본의 무조건 항복이 결정되고 그것을 막으려는 쿠데타가 벌어진 이 사건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감이 잡히질 않았거든요. 권하고 싶은데 쉽게 권할 수가 없는, 그런 영화였습니다. 태평양전쟁의 끝제가 이 영화를 보면서 다시 생각나게 한 것은, 일본이 이미 사실상 패전 상태였음에도 내부에서 그토록 치열하게 버텼다는 사실이었습니다.태평양전쟁(Pacific War)은 1941년 진주만 공습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여기서 태평양전쟁이란 일본 제국이 미국·영국·네덜란드 등 연합국을 상대로 아시아-태평양 전역에서 벌인 전쟁을 가리킵니다. 초반의 기세는 일본 쪽에 있었지만, 1942년 미..
법을 집행하는 사람이 법의 경계를 넘는 순간, 그 정의는 여전히 정의일까요. 영화 을 보고 나서 며칠 동안 이 질문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기무라 타쿠야와 니노미야 카즈나리, 두 배우의 이름만 보고 가볍게 봤는데, 이건 단순한 범죄 스릴러가 아니었습니다. 공소시효, 기소권, 검찰개혁이라는 묵직한 주제들이 영화 한 편 안에 촘촘하게 얽혀 있었습니다. 공소시효가 끝난 죄인법정 드라마를 즐겨 보는 편인데, 공소시효라는 개념이 나올 때마다 묘하게 찝찝한 감정이 남았습니다. 공소시효(公訴時效)란, 범죄가 발생한 뒤 일정 기간이 지나면 국가가 더 이상 그 범죄를 기소할 수 없게 되는 제도입니다. 쉽게 말해, 시간이 지나버리면 설령 범인을 알고 있어도 법적으로 처벌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진다는 뜻입니다.영화..
저는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 일본 형사재판의 유죄율이 99.9%에 달한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습니다. 2007년작 는 만원 전철 안에서 치한 누명을 쓴 26세 청년 카네코 텟페이가 "하지 않았다"는 한마디를 지키기 위해 거대한 사법 시스템과 맞서는 법정 드라마입니다. 보고 나서 한동안 앉아 있었습니다. 기분 좋은 여운이 아니라, 뭔가 불편한 것이 위장 근처에 걸린 느낌이랄까요. 무죄추정 원칙, 사법 현실영화의 핵심을 한 줄로 짚자면, 무죄추정 원칙(presumption of innocence)이 현실에서 얼마나 형식적인 선언에 그치는지를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무죄추정 원칙이란, 유죄 판결이 확정되기 전까지 피의자를 무죄로 간주해야 한다는 근대 형사사법의 대원칙입니다. 그런데 영화 속 텟페이는 경찰서에..
혐오가 연대로 바뀌는 데 얼마나 걸릴까요. 2005년 일본 영화 《메종 드 히미코》는 그 질문에 꽤 정직하게 답합니다. 처음에는 돈 때문에 게이 양로원에 발을 들인 사오리가, 끝에는 자기 발로 그곳을 향해 걸어가는 이야기입니다. 제가 이 영화를 보고 오래 기억에 남은 건 줄거리가 아니라, 빛바랜 여름 색 같은 화면 분위기였습니다. 사오리의 감정변화 어릴 적 어머니와 자신을 버리고 떠난 아버지. 도장 회사에서 일하며 빚을 갚고 있는 딸 사오리 앞에 어느 날 낯선 남자가 찾아옵니다. 아버지 히미코의 연인 하루히코(오다기리 조)였습니다. 그가 꺼낸 제안은 말기 암 판정을 받은 히미코가 설립한 게이 양로원 '메종 드 히미코'에서 일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사오리가 일을 수락한 건 높은 일당과 유산에 대한 기대 ..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3시간 37분짜리 영화를 보면서 저는 계속 범인을 추리하고 있었거든요.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순간, 그 시간 내내 제가 해온 탐정 놀이가 얼마나 쓸모없는 짓이었는지 깨달았습니다. 아오야마 신지의 는 그런 영화입니다. 범죄 미스터리인 척 위장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밥 한 끼와 침묵 하나로 사람이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담담하게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식구가 되는 방식제가 이 영화를 보면서 가장 먼저 떠올린 단어가 '식구(食口)'였습니다. 한국어에서 식구란 한 솥에서 밥을 나눠 먹는 사람들을 뜻합니다. 혈연이 아니어도, 같은 공간에서 밥을 함께 먹는 관계라면 식구가 됩니다. 는 일본 영화인데도 이 개념을 이보다 더 잘 구현하기 어렵겠다 싶을 만큼, 공동식사(共同食事)를 통한 유..
타임리프 영화라고 하면 으레 '범인은 누구인가'라는 미스터리에 집중할 거라 생각했는데, 막상 보고 나니 제 머릿속에 남은 건 살인범 추적이 아니라 외톨이 여자아이 히나즈키 카요와 함께했던 평범한 하루들이었습니다. 2016년 개봉한 《나만이 없는 거리》, 기대와 실제 사이에서 꽤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든 작품입니다. 타임리프라는 설정 타임리프(time leap)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과거의 특정 시점으로 이동하는 현상을 말합니다. 쉽게 말해 단순히 시간을 되감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기억과 의식을 그대로 가진 채 과거의 몸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 영화에서는 이 능력을 '리바이벌'이라고 부릅니다.리바이벌이란 주변에 사고나 위험이 임박했을 때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시간이 되돌아가는 현상입니다. 주인..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보기 전에 리뷰들을 훑었더니 서브남인 코스케를 앓는다는 한줄평이 유독 눈에 띄었거든요. 배우 얼굴을 미리 찾아봤을 땐 '잘생기긴 했지만 그렇게 내 취향은 아닌데' 하고 넘겼는데, 막상 영화를 보면서 30분도 안 돼 코스케밖에 안 보이는 제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2015년작 일본 순정만화 원작 영화 《히로인 실격》, 저처럼 서브남에게 자꾸 꽂히는 분들이라면 각오하고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서브남병 — 코스케가 남주보다 더 남주 같은 이유제게는 소위 '서브남병'이 있습니다. 여기서 서브남병이란, 로맨스물을 볼 때 최종 커플로 낙점된 남주인공보다 조력자 포지션의 서브 남성 캐릭터에게 더 강하게 감정이 이입되는 현상을 말합니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임을 알면서도 묵묵히 곁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