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개봉한 영화 한 편의 OST가 아직도 한국 사람들의 귀에 익숙하다면, 그 힘이 얼마나 대단한 건지 실감하게 됩니다. 저는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가 고등학생 때였는데, 피렌체 두오모 옥상 장면에서 멍하니 화면을 바라봤고, OST가 너무 좋아서 앨범을 사서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 2026년에 다시 보니, 그때와는 또 다른 무게로 가슴에 남습니다. 원작 소설과 영화 냉정과 열정사이를 검색하면 영화 정보가 먼저 뜨는데, 사실 이 작품은 소설이 먼저입니다. 1999년 일본에서 출판된 원작은 한 권짜리가 아니라 두 권으로 나뉜 동시 출간물이었습니다. 츠지 히토나리(辻仁成)가 남자 주인공 준세이의 시점으로 쓴 「냉정 Blu」, 에쿠니 가오리(江國香織)가 여자 주인공 아오이의 시점으로 쓴 「열정 R..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다섯 명이 한 지붕 아래 모여 진짜 가족이 됩니다. 그것도 도둑과 꽃뱀과 학대받은 아이들이 주인공인 영화에서 말이지요. 솔직히 처음 줄거리를 대충 읽어보고 코믹 범죄물이겠거니 생각했는데, 막상 보고 나니 생각과 달리 영화의 장면들이 가슴에 오래 남았습니다. 가족의 정의: 상처가 묶어준 사람들일반적으로 가족이란 혈연 또는 법적 관계로 맺어진 집단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가족사회학(family sociology)에서도 전통적으로는 혈연·혼인·입양을 가족 구성의 3대 조건으로 분류합니다. 여기서 가족사회학이란 가족이라는 집단이 사회 안에서 어떻게 형성되고 기능하는지를 연구하는 학문 분야입니다. 그런데 영화 '앳 홈 At Home'은 이 통념을 정면으로 흔듭니다.제가 영화를 보면서 가..
쉬러 갔다가 오히려 더 피곤해진 적이 있으십니까? 저는 있습니다. 그것도 꽤 여러 번. 일본에서 일하던 시절, 번아웃이 왔을 때 우연히 틀어놓은 영화 한 편이 그 질문에 조용히 답을 줬습니다. 오기가미 나오코 감독의 2007년작 이었습니다. 쉬러 간 섬에서 주인공 타에코는 딱 제가 좋아하는 휴가 스타일의 사람입니다. 아무도 말 걸지 않는 곳, 휴대전화도 안 터지는 곳, 그냥 혼자 조용히 책이나 읽다가 오는 것. 그 계획을 들고 남쪽 바닷가 섬의 작은 펜션을 예약합니다.그런데 도착하자마자 일이 틀어집니다. 여관 주인 유지는 엉성한 손그림 지도를 공항에 남겨두고, 타에코는 그 지도를 어렵지 않게 읽어 펜션을 찾아옵니다. 유지는 그 모습을 보고 "당신은 이 마을에서 살 자격이 있다"라고 말합니다. 의미심장..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데스노트의 L로 각인된 마츠야마 켄이치가 6살짜리 아이를 떠맡은 허둥지둥 청년을 연기한다는 것도 그렇고, 아시다 마나가 또 한 번 심장을 건드린다는 것도요. 일반적으로 육아 영화라고 하면 눈물 짜내는 신파가 먼저 떠오르는데, 버니 드롭은 그 기대를 보기 좋게 빗나갔습니다. 장례식장에서 시작해 학예회로 끝나는 이 작품, 보고 뭉클한 감동이 밀려왔습니다. 장례식장에서 제가 처음 이 영화를 보게 된 건 아시다 마나 때문이었습니다. 드라마 마더에서 그 아이를 보고 완전히 반해버렸거든요. 자연스럽게 버니 드롭으로 흘러왔는데, 도입부부터 예상을 벗어났습니다.27살 미혼 직장인 다이키치는 외할아버지의 부고를 듣고 장례식에 참석합니다. 그런데 거기서 낯선 꼬마 여자아이를 만나죠. 카가..
유튜브 주제곡 조회수 2,290만 회. 숫자만 보고는 그냥 지나쳤는데, 막상 영화를 보고 나서 그 숫자가 왜 나왔는지 이해했습니다. 목소리를 잃은 남자와 시력을 잃은 여자가 말 한마디 없이 서로에게 닿아가는 이야기, . 보고 나서 한동안 조용히 앉아 있었습니다. 침묵의 사랑 영화는 대사 대신 눈빛과 행동으로 감정을 쌓아 올립니다. 청소부로 일하며 무기력하게 살아가던 아오이(야마다 료스케)가 옥상에서 투신하려는 미카(하마베 미나미)를 막아서는 첫 장면부터, 두 사람 사이엔 단 한마디 말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게 이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많은 것이 전해지는 느낌이었습니다.이 영화에서 핵심적으로 작동하는 개념이 바로 비언어적 커뮤니케이션(Non-verbal Communication)입니다. 여기서 ..
범인을 찾는 이야기라기 보다는 왜 그 범죄를 저질렀는지를 말해주는 영화. 저는 이 영화를 보고 엔딩 장면에서 멍하니 있었습니다. 안타깝다고 해야할지, 당연한 결말이라고 해야할지. 완벽한 논리로 쌓아올린 사랑이 결국 그 논리 때문에 무너지는 장면을 보고 나니, 한참동안 말문이 막혔습니다. 와이더닛, 알리바이 트릭보통 추리물은 "누가 죽였나"를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진실에 도달합니다. 범인을 특정하는 순간 카타르시스가 온다는 게 장르의 오래된 공식이죠. 그런데 이 영화는 처음부터 범인을 보여주고 시작합니다. 관객은 야스코 모녀가 우발적으로 전남편 도가시를 살해했다는 사실을 처음부터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영화가 던지는 화두는 전혀 다른 곳에 있습니다.여기서 와이더닛(Whydunit)이라는 개념이 ..
"도망치면 지는 거다"라는 말, 한 번쯤 들어보셨을 겁니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요? 저는 이 영화를 보고 나서 그 말이 얼마나 많은 사람을 갉아먹어 왔는지 새삼 실감했습니다. 월 150시간 무급 야근이 당연한 블랙기업(Black Company), 즉 노동자를 소모품처럼 취급하는 악덕 기업을 배경으로 한 일본 영화 '잠깐만 회사 좀 관두고 올게'. 제목만 보면 가벼운 코미디 같지만, 실제로 보고 나면 웃을 수 없는 장면이 한두 곳이 아닙니다. 번아웃, 그냥 피곤한 게 아닙니다영화 속 주인공 다카시는 전형적인 번아웃(Burnout) 상태입니다. 번아웃이란 단순한 피로와는 다릅니다. 세계보건기구(WHO)는 2019년 번아웃을 국제질병분류(ICD-11)에 공식 직업 현상으로 등재했는데, "만성적 직장 스트레스..
저는 처음에 이 영화가 이런 내용인 줄 모르고 보기시작했습니다. 도쿄 공중화장실을 청소하는 남자가 소박하게 행복하게 사는 이야기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영화가 끝나고 한참 동안 히라야마의 마지막 얼굴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그때서야 깨달았습니다. 이건 행복한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라, 무언가를 잃은 사람이 오늘 하루를 망치지 않으려고 애쓰는 이야기라는 것을. 코모레비 코모레비(木漏れ日)란 나뭇잎 사이로 비쳐드는 햇빛을 뜻하는 일본어입니다. 빛과 그림자가 동시에 존재하는 그 찰나를 포착하는 단어인데, 히라야마가 점심마다 필름 카메라로 찍는 것이 바로 이 장면입니다. 이 영화에서 제게 오래 남은 것도 이 코모레비였습니다. 그가 찍는 건 나무가 아니라 나무가 흔들리는 순간이니까요.일반적으로 이..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영화가 끝나고 한참 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아무도 모른다》는 1988년 실제로 도쿄에서 일어난 스가모 아동 방치 사건을 바탕으로, 네 남매가 엄마 없이 버텨낸 사계절을 담담하게 그려냅니다. 비명도, 과장된 슬픔도 없는데 오히려 그래서 더 오래 가슴에 남았습니다. 방치가 시작되는 방식 영화를 볼 때 제가 가장 당황했던 건 도입부의 분위기였습니다. 이사 온 첫날, 엄마 케이코는 밝고 젊어 보이고, 아이들은 캐리어 속에서 낄낄거리며 나옵니다. 무거운 음악도, 불길한 조짐도 없습니다. 그냥 좀 특이한 가족처럼 보일 뿐이죠. 그게 오히려 더 불안했습니다.집주인에게는 장남 아키라만 알린 채 나머지 세 남매는 숨겨 들어온 이 가족에게는 규칙이 ..
2004년 일본 극장에서 46,616,207달러를 벌어들인 영화가 있습니다. 저는 이 숫자보다 더 놀라운 것은, 개봉 20년이 지난 지금도 비가 오는 날이면 이 영화 제목이 검색창을 오르내린다는 것입니다. 그 영화가 바로 입니다. 처음 봤을 때는 그냥 예쁜 러브스토리인줄 알았는데, 두 번째 볼 때 미오가 내린 선택의 무게를 비로소 제대로 느꼈습니다. 줄거리와 결말 영화는 사실 결말부터 보여줍니다. 곧 18살이 될 유지가 케이크 가게에서 생일 케이크를 받는 장면으로 시작되는데, 이게 단순한 프롤로그가 아닙니다. 이 첫 장면 하나가 영화 전체의 핵심을 조용히 품고 있다는 걸 나중에야 알게 됩니다.엄마 미오를 잃은 타쿠미는 여섯 살 아들 유지와 단둘이 살아갑니다. 공황장애(Panic Disorder)를 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