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터만 봤을 때 솔직히 별 기대가 없었습니다. 레이스와 프릴로 가득한 로리타 드레스를 입은 소녀 포스터가 영 유치해 보였거든요. 그런데 '스쿠터를 타는 폭주족 소녀와의 우정'이라는 줄거리 한 줄이 저를 붙잡았습니다. 나카시마 테츠야 감독의 《불량공주 모모코》(2004)는 그렇게 호기심 반, 의심 반으로 감상한 영화인데, 보고 나서 꽤 오래 머릿속에 남았습니다. 로리타 패션과 양키 문화 처음 이 영화를 보면 '색깔이 지나치다'는 느낌부터 옵니다. 화면은 지나치게 선명하고, 인물들은 현실보다 만화 캐릭터에 가깝게 움직입니다. 애니메이션이 불쑥 끼어들고, 장면이 갑자기 빨라지거나 되감기도 합니다. 저는 처음엔 '이게 뭐지' 싶었는데, 보다 보니 이 연출 자체가 영화의 메시지라는 걸 알게 됐습니다.일본의 평범..
"법정 영화면 어렵고 무거운 거 아니야?" 하고 지레 겁먹은 적이 저는 있었습니다. 그런데 2011년작 일본 영화 은 그 고정관념을 완전히 뒤집어 놓았습니다. 유령을 법정 증인으로 세운다는 황당한 발상 하나로 끝까지 손을 못 놓게 만든 영화, 늦게 본 게 이렇게 후회됐던 작품은 오랜만이었습니다. 법정 코미디, 유령 증인일반적으로 법정 스릴러라고 하면 팽팽한 심리전, 무거운 분위기,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구성이 전부인 줄 알았습니다. 제가 직접 보기 전까지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그런데 은 달랐습니다. 이 영화의 핵심 장치는 증인적격(証人適格)입니다. 여기서 증인적격이란, 법정에 증인으로 설 수 있는 자격 요건을 의미합니다. 보통은 살아있는 인간만이 이 요건을 충족한다고 전제하는데, 이 영화는 바로 그 ..
그냥 가볍게 보려고 시작했던 영화였는데,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었네요. 꽃다발 같은 사랑을 했다는 취향이 꼭 닮은 두 사람이 만나 사랑하고, 그 사랑이 자연스럽게 끝나는 이야기입니다. 누구도 나쁜 사람이 아닌데 왜 이렇게 마음이 아픈지, 그 이유를 오래 생각하게 만드는 영화였습니다. 막차를 놓친 밤제가 처음으로 일본 영화관에서 본 애니메이션이 오시이 마모루 감독의 스카이 크롤러였습니다. 그 한 편이 제 진로를 바꿔놨을 정도였는데, 정작 이 영화 속에서 두 주인공이 오시이 마모루를 매개로 서로를 알아보는 장면에서 저는 한 박자 늦게 알아챘습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이 영화가 얼마나 섬세하게 설계돼 있는지를 실감했습니다.영화는 막차를 놓친 두 대학생, 무기와 키누가 첫차를 기다리며 함께 밤을 보내는 장면으로..
혐오가 연대로 바뀌는 데 얼마나 걸릴까요. 2005년 일본 영화 《메종 드 히미코》는 그 질문에 꽤 정직하게 답합니다. 처음에는 돈 때문에 게이 양로원에 발을 들인 사오리가, 끝에는 자기 발로 그곳을 향해 걸어가는 이야기입니다. 제가 이 영화를 보고 오래 기억에 남은 건 줄거리가 아니라, 빛바랜 여름 색 같은 화면 분위기였습니다. 사오리의 감정변화 어릴 적 어머니와 자신을 버리고 떠난 아버지. 도장 회사에서 일하며 빚을 갚고 있는 딸 사오리 앞에 어느 날 낯선 남자가 찾아옵니다. 아버지 히미코의 연인 하루히코(오다기리 조)였습니다. 그가 꺼낸 제안은 말기 암 판정을 받은 히미코가 설립한 게이 양로원 '메종 드 히미코'에서 일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사오리가 일을 수락한 건 높은 일당과 유산에 대한 기대 ..
솔직히 저는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 초식남(草食男子)이라는 캐릭터가 로맨스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여기서 초식남이란 연애에 적극적이지 않고 자기만의 세계에 조용히 머무르는 남성을 가리키는 일본식 표현입니다. 그런데 2013년작 (원제: 箱入り息子の恋)을 보고 나서 제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켄타로라는 인물이 제 슬픔 포인트를 정확하게 찌르고 들어왔거든요. 켄타로라는 인물, 초식남 영화 정보란에는 켄타로를 '반히키코모리(半引きこもり)'로 표기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반히키코모리란 완전한 은둔형 외톨이는 아니지만 사회적 관계를 극도로 회피하며 집과 직장만을 오가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시청 공무원으로 13년째 말단을 지키며 승진 의욕도 없고, 퇴근 후에는 밥 먹고 게임만 하는 3..
과거로 돌아가도 현실이 바뀌지 않는다면, 굳이 돌아갈 이유가 있을까요? 이 설정을 알았을 때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영화를 다 보고 나서 오히려 그 규칙이 이 영화의 전부라는 걸 알게 됐습니다. 일본영화 〈커피가 식기 전에〉, 조용한 주말 오후에 혼자 봤는데 결말 즈음에서 눈물이 났습니다. 굴곡 없는 영화를 좋아하는 저한테는 꽤 오랜만에 제대로 마음에 박힌 작품이었습니다. 타임슬립 설정 이 영화는 타임슬립(time slip), 즉 시간 이동을 소재로 합니다. 여기서 타임슬립이란 특정 인물이 현재 시점을 벗어나 과거 혹은 미래의 시간대로 물리적으로 이동하는 판타지 장치를 의미합니다. 수많은 타임슬립 영화가 있지만 〈커피가 식기 전에〉가 독특한 이유는 그 조건이 유독 까다롭다는 점입니다.이 카페..
사랑하는 사람을 살리기 위해 시간을 100번 되돌린다면, 그게 진짜 사랑일까요, 아니면 집착일까요. 저는 이 영화를 보는 내내 그 경계 어딘가에서 계속 걸려 넘어졌습니다. 일본 영화 특유의 청량한 감성 위에 타임리프라는 판타지 장치를 얹은 작품, 입니다. 타임리프를 100번 반복해도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무엇이든 바꿀 수 있을 것 같지만, 이 영화는 처음부터 그 전제를 조용히 부숩니다.주인공 하세가와 리쿠(사카구치 켄타로)는 '인생 레코드'라는 장치를 손에 넣으면서 타임리프 능력을 갖게 됩니다. 여기서 타임리프(time leap)란 특정 시점으로 의식이나 기억을 되돌려 과거의 상황을 다시 경험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SF 장르에서 자주 쓰이는 개념인데, 이 영화에서는 그것을 낡은 레코드판이라는 아..
처음 이 영화를 봤을 때, 저는 스토리보다 화면에 가득 찬 음식에만 눈이 갔습니다. 영하 54도 남극 기지에서 튀김이라니, 라멘이라니. 그런데 두 번째로 다시 봤을 때는 달랐습니다. 음식 너머로 사람 냄새가 진하게 배어 있었습니다. 극한의 고립감 속에서 인간이 어떻게 버티는지, 그리고 한 그릇의 밥이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2009년작 를 보고 다시 감동을 받았습니다. 고립감이 사람을 어떻게 바꾸는가영화의 배경은 1997년 일본 남극 돔 후지 기지입니다. 해발 3,810m, 평균 기온 영하 54도. 연안의 쇼와 기지에서 약 1,000km 떨어진 내륙 오지입니다. 펭귄도, 바다표범도, 심지어 바이러스조차 생존할 수 없는 곳이라는 설명이 영화 초반에 나오는데, 제가 처음 들었을 때 그냥 웃어넘겼습니다...
솔직히 저는 이 영화 초반부는 너무 심심하게 느껴졌습니다. 특별한 사건이 없어서 단조로웠거든요. 그런데 끝까지 보니, 가슴이 먹먹했습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는 장남의 기일에 모인 하루동안의 가족의 이야기입니다. 극적인 사건은 없지만 그 속에 아주 날카로운 진실이 숨어 있었습니다. 가족애도, 우리를 불편하게 만드는 이유영화를 보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가족, 어딘가에서 본 것 같다.' 아버지 쿄헤이는 의사로서의 삶에 모든 자부심을 걸었던 사람입니다. 장남 준페이가 세상을 떠나고 나서도, 차남 료타에게 의업을 이어 달라는 기대를 내려놓지 못합니다. 겉으로는 말을 아끼지만, 료타가 미술품 복원 일을 한다고 하면 식탁에 미묘한 침묵이 깔립니다. 저도 겪어봤는데, 그 침묵이 백 마디 잔..
범인을 찾는 이야기라기 보다는 왜 그 범죄를 저질렀는지를 말해주는 영화. 저는 이 영화를 보고 엔딩 장면에서 멍하니 있었습니다. 안타깝다고 해야할지, 당연한 결말이라고 해야할지. 완벽한 논리로 쌓아올린 사랑이 결국 그 논리 때문에 무너지는 장면을 보고 나니, 한참동안 말문이 막혔습니다. 와이더닛, 알리바이 트릭보통 추리물은 "누가 죽였나"를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진실에 도달합니다. 범인을 특정하는 순간 카타르시스가 온다는 게 장르의 오래된 공식이죠. 그런데 이 영화는 처음부터 범인을 보여주고 시작합니다. 관객은 야스코 모녀가 우발적으로 전남편 도가시를 살해했다는 사실을 처음부터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영화가 던지는 화두는 전혀 다른 곳에 있습니다.여기서 와이더닛(Whydunit)이라는 개념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