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영화 한 편이 며칠째 머릿속을 떠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저에게 「앙: 단팥 인생 이야기」가 딱 그랬습니다. 처음엔 도라야키를 만드는 따뜻한 음식 영화인 줄 알았는데, 다 보고 나서는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습니다. 삶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라는 질문을 이렇게 조용히 던져주는 영화가 또 있을까 싶었습니다. 편견이라는 보이지 않는 벽 솔직히 고백하자면, 도쿠에 할머니가 처음 등장했을 때 저도 모르게 '저분은 좀 이상한 건 아닌가?'라고 생각했습니다. 손가락이 심하게 뒤틀린 채 일흔여섯의 나이로 아르바이트를 지원하는 모습이 낯설게 느껴졌던 거죠. 그런데 영화가 진행될수록 그 판단이 얼마나 얄팍한 것이었는지 스스로 부끄러워졌습니다.영화는 도쿠에의 과거를 통해 한센병(Hansen's disease) ..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제목만 보고 따뜻한 가족 드라마 정도로 짐작했는데, 영화를 다 보고 나서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습니다. 죽음을 선고받은 엄마가 남은 시간을 어떻게 쓰는지 보여주는 이 영화는, 신파로 흘러갈 법한 모든 순간을 후타바(미야자와 리에)의 단단함으로 부여잡습니다. 불치병, 왕따, 외도, 배 다른 형제까지 막장 요소가 총집합인데도 이상하게 마음이 무너지지 않고 오히려 단단해지는 느낌이 드는 영화였습니다. 배경과 맥락 제가 이 영화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목욕탕이라는 공간이었습니다.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가족의 상태를 보여주는 바로미터로 기능하는데, 남편 카즈히로(오다기리 조)가 사라진 뒤 굴뚝에서 연기가 끊기는 장면이 그걸 압축적으로 보여줍니다.카즈히로가 혼자 집을 나..
솔직히 저는 히가시노 게이고 하면 《용의자 X의 헌신》이나 《백야행》 같은 서늘하고 치밀한 미스터리만 쓰는 작가라고 단정 짓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을 처음 접했을 때, 이렇게 따뜻한 이야기가 같은 작가 손에서 나왔다는 사실이 꽤 놀라웠습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이게 정말 미스터리 소설인가?" 싶을 정도로 구성이 정교했고, 다 보고 난 뒤에도 한동안 자리를 못했습니다. 시간여행, 인연의 방정식이 영화를 처음 보는 분들이 가장 혼란스러워하는 부분이 바로 시간 구조입니다. 제가 처음 봤을 때도 마찬가지였는데, 도둑 세 명이 숨어든 폐가에서 32년 전 편지가 날아온다는 설정이 처음엔 그냥 판타지 장치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이야기가 쌓이면서 이게 단순한 판타지가 아니라 촘촘하게 짜..
부모님의 이혼으로 생이별한 초등학생 형제가 "신칸센 두 열차가 처음 교차하는 순간 기적이 일어난다"는 소문을 믿고 구마모토로 비밀 여행을 떠납니다. 처음 이 영화 줄거리를 접했을 때,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아이들의 허무맹랑한 모험담인 줄 알았는데, 다 보고 나서 한참을 가슴이 먹먹했습니다. 고레에다, 신칸센 개통이 영화는 첫 장면부터 범상치 않습니다. 활화산인 사쿠라지마(桜島)가 내뿜는 화산재가 눈처럼 내리는 가고시마 골목에서 코이치가 빨래를 걷어 들이는 장면으로 시작하거든요. 사쿠라지마는 실제로 연간 수백 회 소규모 분화를 반복하는 일본의 대표적인 활화산으로, 가고시마 시민들은 매일 화산재 청소를 생활의 일부로 받아들이며 살아갑니다(출처: 가고시마시 공식 홈페이지). 그 지긋지긋한 화산재가..
쉬러 갔다가 오히려 더 피곤해진 적이 있으십니까? 저는 있습니다. 그것도 꽤 여러 번. 일본에서 일하던 시절, 번아웃이 왔을 때 우연히 틀어놓은 영화 한 편이 그 질문에 조용히 답을 줬습니다. 오기가미 나오코 감독의 2007년작 이었습니다. 쉬러 간 섬에서 주인공 타에코는 딱 제가 좋아하는 휴가 스타일의 사람입니다. 아무도 말 걸지 않는 곳, 휴대전화도 안 터지는 곳, 그냥 혼자 조용히 책이나 읽다가 오는 것. 그 계획을 들고 남쪽 바닷가 섬의 작은 펜션을 예약합니다.그런데 도착하자마자 일이 틀어집니다. 여관 주인 유지는 엉성한 손그림 지도를 공항에 남겨두고, 타에코는 그 지도를 어렵지 않게 읽어 펜션을 찾아옵니다. 유지는 그 모습을 보고 "당신은 이 마을에서 살 자격이 있다"라고 말합니다. 의미심장..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데스노트의 L로 각인된 마츠야마 켄이치가 6살짜리 아이를 떠맡은 허둥지둥 청년을 연기한다는 것도 그렇고, 아시다 마나가 또 한 번 심장을 건드린다는 것도요. 일반적으로 육아 영화라고 하면 눈물 짜내는 신파가 먼저 떠오르는데, 버니 드롭은 그 기대를 보기 좋게 빗나갔습니다. 장례식장에서 시작해 학예회로 끝나는 이 작품, 보고 뭉클한 감동이 밀려왔습니다. 장례식장에서 제가 처음 이 영화를 보게 된 건 아시다 마나 때문이었습니다. 드라마 마더에서 그 아이를 보고 완전히 반해버렸거든요. 자연스럽게 버니 드롭으로 흘러왔는데, 도입부부터 예상을 벗어났습니다.27살 미혼 직장인 다이키치는 외할아버지의 부고를 듣고 장례식에 참석합니다. 그런데 거기서 낯선 꼬마 여자아이를 만나죠. 카가..
"도망치면 지는 거다"라는 말, 한 번쯤 들어보셨을 겁니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요? 저는 이 영화를 보고 나서 그 말이 얼마나 많은 사람을 갉아먹어 왔는지 새삼 실감했습니다. 월 150시간 무급 야근이 당연한 블랙기업(Black Company), 즉 노동자를 소모품처럼 취급하는 악덕 기업을 배경으로 한 일본 영화 '잠깐만 회사 좀 관두고 올게'. 제목만 보면 가벼운 코미디 같지만, 실제로 보고 나면 웃을 수 없는 장면이 한두 곳이 아닙니다. 번아웃, 그냥 피곤한 게 아닙니다영화 속 주인공 다카시는 전형적인 번아웃(Burnout) 상태입니다. 번아웃이란 단순한 피로와는 다릅니다. 세계보건기구(WHO)는 2019년 번아웃을 국제질병분류(ICD-11)에 공식 직업 현상으로 등재했는데, "만성적 직장 스트레스..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영화가 끝나고 한참 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아무도 모른다》는 1988년 실제로 도쿄에서 일어난 스가모 아동 방치 사건을 바탕으로, 네 남매가 엄마 없이 버텨낸 사계절을 담담하게 그려냅니다. 비명도, 과장된 슬픔도 없는데 오히려 그래서 더 오래 가슴에 남았습니다. 방치가 시작되는 방식 영화를 볼 때 제가 가장 당황했던 건 도입부의 분위기였습니다. 이사 온 첫날, 엄마 케이코는 밝고 젊어 보이고, 아이들은 캐리어 속에서 낄낄거리며 나옵니다. 무거운 음악도, 불길한 조짐도 없습니다. 그냥 좀 특이한 가족처럼 보일 뿐이죠. 그게 오히려 더 불안했습니다.집주인에게는 장남 아키라만 알린 채 나머지 세 남매는 숨겨 들어온 이 가족에게는 규칙이 ..
문학상을 받은 지 15년이 지나도록 두 번째 소설을 쓰지 못한 남자. 꿈과 현실 사이 어딘가에서 발이 묶인 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료타. 가족의 회복을 원하지만 맘대로 되지않습니다. 이 영화는 삶이 그렇게 거창할 필요는 없다고 조용하고 차분하게 알려줍니다. 앞으로 나아가고 있으면 되는 것이라고요. 료타라는 인물이 불편한 이유영화 의 주인공 료타(아베 히로시)는 흔히 말하는 '공감형 주인공'과는 거리가 멉니다. 한때 신인 문학상을 받으며 주목받았지만 지금은 사설 흥신소에서 탐정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소설 취재를 위한 것"이라는 핑계를 스스로 하면서요. 저도 비슷한 자기 합리화를 많이 해왔던지라 보면서 웃음이 났습니다.더 문제는 흥신소에서 번 돈을 경마로 탕진하고, 전처 쿄코(마키 요코)에게..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이미 답을 안다고 생각했습니다. 불길이 치솟는 하천부지, 무표정하게 자리를 뜨는 남자. 누가 봐도 명백한 장면이었으니까요. 그런데 두 시간이 지난 뒤, 나의 생각은 "나는 아무것도 몰랐다"였습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은 친절하게 하나하나 알려주지 않습니다. 판단은 관객의 몫입니다. 법정 드라마 이 영화가 단순한 법정 드라마인 줄 알았습니다. 엘리트 변호사가 전과자를 변호하고, 우여곡절 끝에 극적인 무죄 판결을 받아내는 그런 류의 이야기라고 짐작했죠. 그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습니다.변호사 시게모리(후쿠야마 마사하루)는 미스미(야큐쇼 코지)를 처음 만나는 순간부터 통제권을 잃기 시작합니다. 미스미는 첫 접견에서 도박 빚을 갚으려 사장을 죽였다고 실토하지만, 시게모리는 이를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