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자전적 소설 『연인』은 1984년 프랑스 최고 권위의 문학상인 공쿠르상(Prix Goncourt)을 수상하며 전 세계에 알려졌습니다. 장 자크 아노 감독이 1992년에 스크린으로 옮겼습니다. 식민지 베트남이라는 이국적이고 쓸쓸한 풍경 속에서, 가난한 프랑스 소녀와 부유한 중국인 남자의 만남. 지독한 열병과 같았던 그리움을 한 폭의 수채화처럼 가슴 시리게 담아낸 작품입니다. 시대적 결핍이 만들어낸 구조영화는 식민지(Colonial Society) 체제 아래 놓인 1920년대 후반 베트남 사이공을 배경으로 합니다. 식민지 체제란 지배국이 피지배 지역의 경제·문화·정치를 장악하는 구조를 말하는데, 영화 속 소녀(제인 마치)의 삶은 그 체제 안에서 이중으로 소외되어 있습니다. 프랑스인이지만..
1990년 개봉 당시 홍콩 박스오피스를 휩쓴 《천장지구》는 지금도 홍콩 영화 황금기를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작품 중 하나입니다. 저는 처음 이 영화를 봤을 때 "이게 30년 전 영화라고?" 싶었습니다. 유덕화의 눈빛 하나가 대사 열 줄보다 더 많은 것을 말하고 있었습니다. 천장지구, 홍콩 누아르 혹시 '홍콩 누아르(Hong Kong Noir)'라는 장르를 들어보신 적 있으신가요? 홍콩 누아르란, 1980~90년대 홍콩 영화 특유의 범죄·액션·멜로가 뒤섞인 장르 문법을 말합니다. 쉽게 말해 총성과 눈물이 한 프레임 안에 공존하는 영화들이죠. 《천장지구》는 그 장르의 정점에 있는 작품입니다.연출을 맡은 진목승 감독은 당시 신예였지만, 이 작품 하나로 자신의 이름을 확실히 각인시켰습니다. 제작에는..
처음 봤을 때는 양조위만 보였습니다. 아휘의 눈빛, 아휘의 침묵, 아휘가 혼자 삼키는 감정들. 그런데 다시 본 「해피 투게더」는 달랐습니다. 화면 속에서 제가 놓쳤던 것은 보영이었고, 그를 다시 마주하고 나서야 이 영화가 왜 이렇게 오래 마음에 남았었는지 이해가 됐습니다. 해피 투게더, 왕가위의 미장센 왕가위 감독의 영화를 처음 접한 건 「중경삼림」이었습니다. 그때부터 느꼈던 것인데, 왕가위 감독은 이야기보다 감정의 질감을 먼저 찍는 사람입니다. 「해피 투게더」도 마찬가지였고, 직접 다시 보니 그것이 더 또렷하게 느껴졌습니다.영화의 원제는 「춘광사설(春光乍洩)」입니다. 구름 사이로 살짝 비치는 봄빛, 혹은 감추고 싶었던 비밀이 스며 나온다는 뜻입니다. 제목 자체가 이미 이 영화의 전부를 말해 주고 있습..
1995년 개봉한 왕가위 감독의 는 원래 의 세 번째 에피소드로 기획됐다가 러닝타임 문제로 별도 제작된 작품입니다. 처음 이 영화를 봤을 때, 난해하게 느껴졌었습니다. 스토리를 '따라가는' 영화가 아니라 스토리에 '잠기는' 영화였거든요. 홍콩 반환을 2년 앞두고 만들어진 이 작품은, 화려한 네온사인 뒤에 숨겨진 청춘의 고독을 치명적인 영상미로 그려냈습니다. 타락천사, 킬러와 에이전트 영화의 첫 번째 파트는 킬러 황지민과 그의 동업자 에이전트 이야기입니다. 두 사람은 한 번도 직접 대면하지 않습니다. 에이전트는 임무 현장을 사전 답사해 손으로 직접 그린 조감도(鳥瞰圖)—하늘에서 내려다보듯 공간 전체를 파악한 평면 스케치—를 팩스로 보내고, 황지민은 그 정보를 토대로 움직입니다. 정보를 입력하면 결과를 출..
한때 좋아했던 사람의 전화번호를 아직도 외우고 있다는 사실을 문득 깨달은 적이 있습니다. 지웠다고 생각했는데, 손이 먼저 기억하고 있더군요. 왕가위의 〈2046〉을 다시 본 것은 그날 밤이었습니다. 이 영화는 사랑 이야기처럼 포장되어 있지만, 실은 기억이 사람을 어떻게 붙들어두는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차우 모완(양조위)은 떠났지만, 정작 아무데도 가지 못한 남자입니다. 화양연화에서 2046으로 〈2046〉을 처음 봤을 때 솔직히 당혹스러웠습니다. 서사가 친절하지 않고, 인물들이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 설명도 잘 안 해줍니다. 그런데 〈화양연화〉를 먼저 본 뒤 다시 보니 완전히 다른 영화로 보였습니다. 이것은 꽤 드문 일입니다. 전작을 알아야만 비로소 이해가 되는 영화가 있다는 것을 실감했습니다.〈화양연..
불륜 영화라고 하기에는 자극적인 장면이 없습니다. '화양연화'는 단 한 번의 키스 장면도 없이 관객을 숨막히게 만듭니다. 처음 봤을 때 자극적 장면없이 이렇게 이끌리는 감정을 그려냈다는 것에 놀랐습니다. 1962년 홍콩을 배경으로, 각자의 배우자에게 배신당한 두 사람이 서로에게 스며드는 과정을 왕가위 감독 특유의 미장센(mise-en-scène)으로 담아낸 작품입니다. 대사보다 눈빛이, 설명보다 색깔 하나가 더 많은 것을 말하는 영화입니다. 화양연화, 미장센의 언어 왕가위 감독 영화를 좋아하는 분들 사이에서는 "화양연화가 그의 최고작"이라는 의견이 많은데, 저도 개인적으로 그 말에 동의하는 편입니다. 미장센(mise-en-scène)이란 프레임 안에 배치된 모든 시각적 요소, 즉 조명·색채·배우의 동..
무더운 여름 소파에 늘어져 있다가 '중경삼림'이라는 제목을 보고 무심코 영화를 보기 시작했습니다. OST는 귀에 익은데 정작 한 번도 본 적 없던 영화였는데, 30년이 지난 지금 봐도 전혀 촌스럽지 않았습니다. 오래전 홍콩 여행 중 느꼈던 그 축축하고 역동적인 감성이 그대로 스크린에 담겨 있는 듯 해서 좋았습니다. 이 영화는 멜로인 듯, 멜로가 아닌 듯 묘한 매력이 있는 옴니버스 영화입니다. 청킹 맨션과 홍콩 반환 영화 제목인 '중경삼림(重慶森林)'을 직역하면 '중경의 빌딩 숲'입니다. 중경, 즉 청킹(Chungking)은 홍콩 중심가에 위치한 지역으로, 악명 높은 청킹 맨션이 자리한 곳입니다. 여기서 청킹 맨션이란 1960년대 지어진 복합 건물로, 이민자·여행자·노점상이 뒤섞인 홍콩에서 가장 혼잡한 ..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한 번쯤 "이 순간을 영원히 기억할 거야"라고 말해본 적 있으신가요. 저는 〈아비정전〉을 처음 봤을 때 오히려 그 반대 느낌을 받았습니다. 아비가 수리진에게 건네는 1분의 약속은 사랑의 시작이 아니라, 상실을 미리 박제해두는 일종의 자기방어였습니다. 왕가위 감독의 1990년 작 〈아비정전〉은 뿌리 없는 한 청년이 사랑도 정체성도 잃어가는 과정을 초록빛 습기 속에 가두어 둔 영화입니다. 발 없는 새 — 처음부터 예고된 결말영화는 시작과 동시에 결말을 슬며시 내보입니다. 안개 낀 열대 밀림이 느린 카메라에 실려 흐르고, 서정적인 기타 선율 위로 제목이 떠오릅니다. 처음엔 그냥 분위기 연출이라고 생각했는데, 영화가 끝나고 나서야 그 밀림이 아비가 죽기 직전 기차 차창 밖으로 바라본 마지..
솔직히 저는 이 영화를 한참 늦게 봤습니다. 부모님 세대 영화라는 선입견 때문이었는데, 막상 보고 나서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습니다. 1996년작 홍콩영화 첨밀밀은 달콤하다는 뜻의 제목과 달리, 씁쓸하고 긴 여운을 남기는 작품입니다. 장만옥과 여명이라는 두 배우의 10년간의 엇갈림을 따라가다 보면, 이것이 단순한 멜로가 아니라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첨밀밀이라는 제목이 담고 있는 것첨밀밀(甜蜜蜜)은 한자 그대로 풀면 '달콤하고 달콤하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蜜은 꿀을 뜻하는 글자로, 꿀처럼 달콤한 상태를 두 번 겹쳐 강조한 형용사입니다. 제목만 보면 설탕 범벅 로맨스가 떠오르는데, 실제로 영화를 보고 나면 그 달콤함이 어디서 오는지, 동시에 왜 그렇게 씁쓸한지를 몸으로 이해하게 됩니다.영어 부제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