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사람과 하루를 온전히 시간을 보낸다는 게 낭만일까요, 아니면 그냥 시간 낭비일까요. 저는 이 영화를 보면서 꽤 오래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일본 영화 "흐르는대로"는 어떤 사건도, 극적인 반전도 없이 그냥 두 사람이 걷고 말하고 또 걷는 하루를 따라갑니다. 그런데 다 보고 나서 이상하게 뭔가 남더라고요. 끌림 영화는 버스 안에서 시작합니다. 주인공 사토미(카라타 에리카)가 옆자리 낯선 남자 토모노리(엔도 유야)의 책을 슬쩍 훔쳐보는 장면인데요. 제가 본 첫인상은 "아 맞아, 저 상황 나도 해봤다"였습니다. 요즘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종이책 읽는 사람 보면 괜히 눈이 가잖아요. 딱 그 감각으로 영화가 시작됩니다.토모노리가 버스에서 내리면서 책갈피를 떨어뜨리고, 사토미는 그걸 줍습니다. 이 장면이 영화..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극장 불이 켜지고 나서도 한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공포영화를 보고 나서야 느끼는 그 불쾌한 찝찝함이 남는 영화였습니다. 그런데 이 영화엔 귀신도 살인마도 없습니다. 있는 건 딱 하나, 너무나 그럴듯한 현실뿐이었습니다. 근미래 배경이 만들어낸 현재의 공포영화가 시작되자마자 저는 "아, 이건 SF가 아니구나"라는 걸 직감했습니다. 배경은 분명 근미래 도쿄입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지진이 발생하고, 점멸등이 일렁이는 불안정한 도시. 그런데 이 세계가 낯설지 않습니다. 오히려 지금 우리가 사는 세계에서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이 그대로 곪은 채 시간만 흐른 것처럼 보였습니다.학교에 AI 감시 체제가 도입되는 장면이 그 출발점입니다. 여기서 판옵티콘(Panopticon)..
타임리프 설정의 영화라고 하면 대부분 화려한 액션이나 복잡한 퍼즐 같은 구조를 먼저 떠올리기 마련입니다. 저도 처음엔 그랬습니다. 그런데 《나만이 없는 거리》를 보고 나서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이 영화가 진짜로 하려는 이야기는 과거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혼자였던 아이 곁에 누군가가 있어줬다면 어땠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리바이벌이라는 능력 타임리프(time leap)라는 개념, 즉 시간을 거슬러 과거로 이동하는 능력을 다루는 작품은 이미 많습니다. 일반적으로 이런 설정에서 주인공은 능력을 자유롭게 제어하고, 원하는 시점으로 돌아가 상황을 유리하게 바꿉니다. 그런데 이 영화의 주인공 후지누마 사토루가 가진 리바이벌은 그런 개념이 아닙니다. 여기서 리바이벌이란 사토루 본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주변..
일본 영화가 원작 소설을 얼마나 충실히 옮기는지 반신반의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을 보고 나서 그 의심이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24건의 살인 중 단 1건만 부정하는 연쇄살인범, 그리고 그 살인범의 의뢰를 받아 진범을 추적하는 대학생. 이 황당하면서도 소름 돋는 설정이 실제로 스크린에서 제대로 작동하는지 직접 확인해봤습니다. 질서형 연쇄살인범이라는 설정 일반적으로 연쇄살인범 영화라고 하면 잔혹한 장면을 전면에 내세운 공포물을 먼저 떠올리기 마련입니다. 저도 처음엔 그런 맥락으로 접근했는데, 실제로는 전혀 다른 결이었습니다.이 영화의 핵심은 '질서형 연쇄살인범(Organized Serial Killer)'이라는 범죄심리학 개념에 있습니다. 여기서 질서형 연쇄살인범이란, 높은 지능과 철저한 사전 계획을..
영화 소식을 들었을 때 솔직히 반가움보다 걱정이 먼저였습니다. 원작의 감동을 망칠까봐요. 그런데 막상 영화를 보니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신카이 마코토의 애니메이션 명작 '초속 5센티미터'가 원작 팬이라면 영화도 분명 좋아하실 것입니다. 둘 다 보면서 차이점을 찾아보는 것도 흥미로울 것 같습니다. 원작 팬이 놓치기 쉬운 구조 변화원작 애니메이션을 처음 봤을 때 제가 가장 인상 깊었던 건 옴니버스 구성이었습니다. 여기서 옴니버스(omnibus)란 하나의 세계관 안에서 독립된 에피소드들이 나란히 놓이는 서사 방식을 말합니다. 원작은 세 편의 단편이 각각 다른 계절과 장소를 무대로 타카키의 시간을 조각조각 보여줍니다. 그 단절감 자체가 작품의 핵심 정서였죠.실사 영화는 이 구조를 완전히 해체했습니다. 대신 액..
3시간짜리 영화를 보고 나서 차 안에 한참 앉아 있었던 적이 있습니다. 〈드라이브 마이 카〉를 처음 봤을 때 얘기입니다. 아무것도 하기 싫었던 게 아니라, 뭔가를 해버리면 그 여운이 깨질 것 같아서였습니다. 이 영화는 상실을 극복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상실을 안은 채 어떻게든 살아내는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그 차이가 생각보다 훨씬 크게 와닿았습니다. 유예된 애도 영화의 주인공 가후쿠는 아내 오토의 외도를 목격하고도 끝내 묻지 않습니다. 처음엔 이 설정이 좀 납득이 안 됐습니다. 왜 묻지 않지? 하는 생각이요. 그런데 직접 곱씹어보니, 저도 비슷한 경험이 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분명히 알고 있으면서도, 그걸 입 밖에 꺼내는 순간 모든 게 무너질 것 같아서 모른 척 살아간 적이. 가후쿠의 침묵은 비..
시골로 이주하면 삶이 단순해지고 행복해진다고들 합니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요. 영화 는 낚시를 위해 도쿄를 떠난 한 남자의 이야기인데, 저는 보는 내내 "이게 로맨스 영화인지, 일본 사회 다큐인지" 경계가 흐릿해지는 경험을 했습니다. 아키야(空き家), 즉 '빈집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다는 게 처음엔 낯설었지만 보고 나면 한국 얘기이기도 하다는 걸 부정하기 어렵습니다. 아키야(빈집문제): 영화가 건드린 진짜 사회 문제아키야(空き家)란 말 그대로 일본어로 '빈 집'을 뜻합니다. 여기서 아키야 문제란 단순히 집이 비어 있다는 것에 그치지 않고, 고령화와 도시 집중 현상이 결합하면서 지방과 교외의 주택이 대규모로 방치되는 구조적 사회 현상을 가리킵니다.일본 전체 주택 중 아키야 비율은 현재 13%에 달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살리기 위해 시간을 100번 되돌린다면, 그게 진짜 사랑일까요, 아니면 집착일까요. 저는 이 영화를 보는 내내 그 경계 어딘가에서 계속 걸려 넘어졌습니다. 일본 영화 특유의 청량한 감성 위에 타임리프라는 판타지 장치를 얹은 작품, 입니다. 타임리프를 100번 반복해도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무엇이든 바꿀 수 있을 것 같지만, 이 영화는 처음부터 그 전제를 조용히 부숩니다.주인공 하세가와 리쿠(사카구치 켄타로)는 '인생 레코드'라는 장치를 손에 넣으면서 타임리프 능력을 갖게 됩니다. 여기서 타임리프(time leap)란 특정 시점으로 의식이나 기억을 되돌려 과거의 상황을 다시 경험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SF 장르에서 자주 쓰이는 개념인데, 이 영화에서는 그것을 낡은 레코드판이라는 아..
별생각 없이 보기시작했다가 끝까지 보게 된 영화가 있습니다. 2005년 제작, 2006년 국내 개봉한 일본 코미디 영화 '거북이는 의외로 빨리 헤엄친다'입니다. 처음엔 그냥 가볍게 볼 수 있는 영화인 줄 알았는데, 다 보고 나서도 며칠 동안 머릿속에서 지워지지가 않았습니다. 특히 라면 가게 사장님 장면은 지금도 가끔 생각납니다. 줄거리와 결말 영화는 거북이 타로에게 밥을 주는 주부 스즈메의 모습으로 시작합니다. 해외에 단신 부임 중인 남편은 안부 전화를 걸어서도 아내 걱정보다 거북이가 밥은 먹었는지를 먼저 묻습니다. 제가 이 오프닝을 보면서 픽 웃었던 이유는, 저도 이런 일상을 아주 잘 알기 때문입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하루가 쌓여서 사람을 조금씩 투명하게 만드는 느낌, 그게 스즈메한테서 바로..
솔직히 저는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 실종 가족이 언론에 나오는 모습을 보면서 그냥 안타깝다고만 생각했습니다. 그 이상은 생각하지 않았던 거죠. 2024년 일본 영화 미싱(Missing)은 그 안일한 시선을 완전히 부숴버린 작품이었습니다. 범인을 잡는 스릴러가 아니라, 아이를 잃은 가족이 무너져 가는 과정을 현실을 과장 없이 있는 그대로 재현하는 방식으로 담아낸 영화입니다. 실종가족이 겪는 진짜 고통 영화는 딸 미우가 실종된 지 3개월이 지난 시점에서 시작됩니다. 엄마 사오리(이시하라 사토미)와 아빠 유타카(아오키 무네타카)는 매일 전단지를 들고 거리를 헤맵니다. 조그마한 단서라도 있으면 몸을 먼저 움직이고, 경찰서를 수시로 들러 확인하고, 방송국 문을 두드립니다. 제가 이 장면들을 보면서 느낀 건 '처..